오피니언 사내칼럼

[이신우 칼럼] 영화 '베테랑' 속 재벌과 민노총

영화 '베테랑'의 이분법적 사회인식

재벌은 惡, 노동단체 善으로 분류

불행히도 '집단 정의'란 허구일 뿐


국내 하천에 녹조가 발생할 때마다 환경운동가들이 매번 손가락질하는 주범은 4대강 개발이다.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수자원 개발이 환경을 파괴해버렸다는 뜻이다. 반면 이들이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대목이 있다. 지역 주민들의 무분별한 환경오염 행위다.

하천 녹조 현상은 축산 분뇨, 비료, 생활하수 유입 등으로 인한 수질의 부영양화가 가장 큰 배경이다. 그렇다면 환경단체는 축산분뇨나 각종 오수의 무단 방출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거나 지역 주민의 오염물질 줄이기 등을 계몽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침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최종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판에 대중을 비판하고 계몽하려 들 경우 당장 자신들에 대한 지지 철회는 물론 조직의 존립조차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환경단체나 운동가들이 정부에만 비판의 화살을 정조준하는 가장 큰 이유다.

영화 '베테랑'에서는 정부의 자리를 재벌이 대신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재벌 그룹은 온갖 비리의 집합체다. 재벌 3세 조태오는 우리가 흔히 신문 사회면에서 접해온 가진 자들의 어두운 면을 모조리 쓸어 담아놓은 인물이다.

'베테랑'은 재벌과 노동자·민노총의 이항 대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종의 계급투쟁론적 사회 인식이다. 계급론은 세상사를 모조리 '나쁜 너' '좋은 나'의 이분법으로 풀어나간다. 그럼에도 이런 원초적 인식구조가 생존력을 갖는 것은 대중 동원에서 나름대로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를 강자와 약자로 무 자르듯 나눠버리면 선과 악이 배타적으로 분리되면서 약자 계층을 선으로, 강자 집단은 악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선의 편에 선 자들은 자연히 악의 편에 선 자들을 타도할 도덕적 정당성까지 담보하게 된다.


계급론에는 이런 논리적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정당하지 못하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은폐하는데도 대단히 편리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민노총 성폭행 사건 등에서 흔히 나타나듯 구성원들은 개인의 인권보다 조직을 앞세운다. 노조 지도부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조직을 생각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수십 차례 보냈다는 인권연대 등의 고발이 전형적 예다. 도덕과 정의를 참칭하는 집단 안으로 도피하기만 하면 책임을 희석할 수 있다는 계산된 행동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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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 '베테랑' 등에서 암시하는 집단적 정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적 정의만이 있을 뿐이다. 하긴 개인 차원에서조차 선과 악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법이다.

중국 천태종을 연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면서 인간의 한 상념마다 무려 3,000가지 생각의 파편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천사다운 면모에서 악마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내용이 다 포함돼 있다. 우리 모두 다 그런 인간일 뿐이다.

물론 자본가 집단 안에 존재하는 '악덕 자본가'를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 집단 안에도 똑같이 '악덕 노동자'는 있게 마련이다.

울산 노동운동의 창시자요, 민노총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권용목씨가 쓴 자기 고발서 '민주노총 충격보고서'에는 노조 지도부의 권력화와 각종 부패·비리 사건이 적나라하게 폭로돼 있다. 그중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대목은 부패나 비리 사건이 아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다른 비정규직에 대한 이들의 냉혹한 시선과 차별 행위다. "구내식당 반찬도 다르고 휴게실도 다르고 심지어 식권에 그려진 그림조차 다르다."

'베테랑'에서 감독은 민노총 가입자들에게 종북좌파냐고 묻는 저들 자본가를 한껏 비웃어준다. 반면 자기네보다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신음하는 비정규직을 한껏 비웃는 다른 귀족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입을 다문다. 그들의 집단 정의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묻고 싶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니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영원히 자기비판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자기만이 정의와 도덕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만다. 왕조 시대 '왕권신수설'을 외치던 아첨꾼들처럼 현대 사회에서 대중에 영합하려 드는 지식인들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이신우 논설실장 shinwoo@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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