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사망에 따른 자진사퇴 압력에 맞서온 허준영(52) 경찰청장이 취임 11개월만인 29일 오전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농민 사망 조사결과 발표가 있은 지 사흘만에,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이틀 만에 사퇴 뜻을 밝힌 것이다.
허 청장의 사표가 처리되면 그가 역대 어느 청장보다 강력히 추진해온 검ㆍ경수사권 조정 작업에 영향은 물론 곧 있을 경찰 고위간부 인사에도 파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 사표 배경 = 허 청장은 28일 밤까지만 해도 "결코 사퇴 불가라는 입장을 번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농민단체와 야당, 심지어 여당인 열린우리당까지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서자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예산안 처리,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 등 처리를 위해선 야당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의사일정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경찰청장 탄핵'을 내세운 것이 결정타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 청장이 사임의 변에서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지만 연말까지 예산안처리 등 급박한 정치 현안을 고려, 통치에 부담을 드려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퇴를 결정했다"고 밝힌 점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일각에서는 허 청장의 `소신'을 지지했던 청와대가 연말 국정운영이 정상화되지않자 이날 국회 정상화를 위한 허 청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언질을 한 것 아니냐는관측도 있다.
또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서 "(경찰청장에 대한)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권한이 있지 않는 것 같다. 나머지는 정치적 문제인데, 대통령이 권한이 있지 않으면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허 청장의 결단을 촉구했고, 이해찬 총리 역시 경찰청장의 자진 사퇴를 암시하는 발언을 한 것도 큰 부담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 밀듯 밀려드는 압박에다 `인권경찰'을 표방한 경찰 운영의 큰 그림이 농민사망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자 밤샘 고민 끝에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과 수사권을 놓고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경찰 총수로서 자리를 고집하는 게 장기적으로 조직 전체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계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 청장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없다"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새해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국민의 고막을 찢는 일은 없길 바란다"며 불편한 심기도 숨기지 않았다.
어쨌든 경찰은 집회에 참가했던 농민의 사망으로 경찰청장과 서울경찰청장 등핵심 수뇌부 2명이 모두 옷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몰린 셈이 됐다.
◇ 파장 = 경찰 창설 60주년에 맞춰 취임한 허 청장이 경찰의 숙원이었던 검ㆍ경 수사권 조정에 `올인'하다 시피했던 점을 감안할 때 사표 제출에 대한 경찰의 우려는 매우 깊을 수밖에 없다.
수사권 조정이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 날 것이란 전망이우세한 가운데 후임 청장이 허 청장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허 청장이 조직 내부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이를 기반으로 역대 어느 청장보다경찰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는 점에서 그의 `불명예 퇴진'에 따른경찰의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농민사망 문제가 불거지자 경찰 내부에선 허 청장의 책임론보다 `폭력시위를 한쪽에도 책임이 있다'며 사퇴 불가를 외치는 목소리가 많았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권 조정 문제가 허 청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지장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그렇지만 추진력과 과감성 면에서 허 청장 만한 인물이 없지 않겠느냐"고 안타까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