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9일 저녁, 증권사 딜러의 단말기에 외국계 증권사인 UBS워버그로부터 한 건의 리포트가 배달됐다. '삼성전자의 투자의견을 강력 매수에서 보유로 내리고 목표주가도 58만원에서 42만원으로 낮춘다.' 다음날 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삼성전자의 주가는 7.73%나 급락했다. 그해 국내 증시를 뒤흔든 이른바 '워버그 쇼크'였다. 보고서 사전 유출로 징계를 먹기는 했지만 시장은 보고서가 갖는 파괴력에 사경을 헤맸다.
△우리 증시에서 외국계 증권사가 가지는 위력은 대단하다. 칭찬하는 보고서가 나오면 해당 기업 또는 시장은 함박웃음을 짓지만 매도 보고서가 나오면 그야말로 초죽음에 이른다. 1997년 11월5일 홍콩의 페레그린증권이 내놓은 '한국을 떠나라, 지금 당장(Get Out of Korea, Right Now)'이라는 제목의 리포트는 외환위기에 처했던 한국경제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지난해 11월 씨티글로벌마켓증권의 '팔아라'는 한마디에 기세등등하던 엔씨소프트의 주가가 하루아침에 12% 넘게 떨어졌다. 2011년에는 고려아연이 골드만삭스의 공격으로 6% 이상 떨어지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지난달 삼성전자의 고전을 가져왔던 것도 JP모건의 혹평이었다.
△외국계 증권사의 보고서에 시장이 춤추는 것은 우리 증시의 구조를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가총액의 33.72%, 전체 거래액의 3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인이 참고하는 투자전략서인데 영향이 없을 수 없다. 주요 기업들이 수출에 목을 매는 해외의존도 높은 우리 환경에서 상황이야 어렵든 말든 한결같이 '이 주식 좋아요'만 외쳐대는 국내 증권사를 믿기에는 투자자의 불안감도 너무 크다. 자업자득이다.
△CLSA가 내놓은 보고서 하나 때문에 SK하이닉스 주가가 2일 8% 이상 곤두박질쳤다고 한다. 다음날 일부 회복을 했지만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은 아닌 듯하다. 외국계 증권사의 영향력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외국인에 한없이 약한 힘없는 증시의 서글픈 단면이다. 언제쯤 외풍에 시달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움직이는 시장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