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炳璨(경원대 교수)「초곡리」는 강원도 삼척에서 남쪽으로 50리 내려간 동해안에 옴폭하게 들어앉아 있다. 공동어망 두틀과 어선 36척에 의지하여 사는 작은 어촌이다. 초곡리로 들어가자면 해송이 병풍처럼 양편에 늘어선 300M의 신작로를 거친다.
80년 여름. 초곡리를 찾은 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때 초곡리 어촌계장 이상희씨의 집 대청마루는 시끌시끌했었다. 삼척공고 19회 동창회가 열려 22명의 친구가 모여든 날이었다. 상에 오른 생선회는 오징어, 전어, 가자미, 도미, 쥐치를 뒤섞어 꽤 풍성했다. 얼근하게 취한 동창들은 이윽고 마을앞 모래밭으로 몰려나가 왁자지껄하게 기마전을 벌였다.
그해에 이마을에는 113가구 700명이 살았다. 초곡리 사람들은 그때「바다농사」를 짓고 있다고 표현 했었다. 고기떼가 지나는 길목에 좀더 큰 그물을 칠 수 있다면 가구당 300만원 소득은 올리는데... 이것이 초곡리 전체의 소망이었다.
초곡리의 어촌다운 장면을 생각하며 그곳에 다시 가 본 것은 86년이었다. 초곡리는 향리의 안도감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낙후의 서글픔을 풍기고 있었다.
마당에서 그물을 만지던 김성복씨가 지난 몇해동안 고기농사가 부진하여 생활이 힘들었다는 얘기를 시작으로 초곡리의 험난했던 풍상을 들려주었다. 『젊은이들이 자꾸 나가요. 중학교만 나와도 다 나가요. 아들이고 딸이고』 그해 초곡리 주민은 104가구 480명으로 줄어 있었다.
물론 초곡리에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곡리에는 박진택씨 담배가게에 경비전화 한 대가 있을 뿐이었으나 85년말 35세대가 단추식 전화를 놓았다. 이런 외형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초곡리는 여전히 스스로 빈곤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마라톤 선수인 황영조의 고향이 초곡리라는 사실을 안 것은 삼척 지역 구 출신 김정남의원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그 초곡리 가 바로 황영조의 집이 있는 마을』이라고 말해주었으나 그 곳을 다시 찾아볼 기회가 좀처럼 오지않아 벼르고만 있었다.
지난달 26일 하오에 나는 초곡리에 전화를 걸었다. 이장은 13년전인 86년에 어촌계장이던 이상희씨였다. 삼척시는 마을 뒷산을 깎아 황영조 공원과 기념관을 조성하여 개장일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상희이장은 그간 마을 인구는 103가구 256명으로 격감했고, 가구당 평균 소득은 50~60만원 정도로 86년보다 더 빈곤해졌다고 한다. 19년전에는 아직 무명이던 황영조를 포함해 120명이던 초등학생 수가 단 5~6명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으로 승용차 10여대, 1톤 트럭 10여대가 생겼으나, 고기가 점점 고갈하여 바다농사가 어렵다고 이장은 실상을 설명한다.
그 아득한 어촌은 황영조라는 올림픽 승자를 배출할 정도로 물좋은 곳이지만, 그곳에서의 평균적인 삶은 향상되지 못하고 더욱 퇴락하는 형편이다. 한일어업협정에서 어장상실을 자초한 정부의 실책을 보고 나날이 곤궁해지는 초곡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安교수 약력>
한국일보,중앙일보 기자
한국일보 駐越 駐佛특파원,논설위원
시사저널 편집국장, 발행인
경원대 중앙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