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년 서로마제국이 망한 뒤 혼란을 겪던 유럽은 687년 분열된 프랑크왕국들이 통일되면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834년 베르?窪뗀敾막?프랑크왕국은 셋으로 나눠지게 된다. 이 중 동프랑크왕국(주로 지금의 독일)의 오토(Otoo)대제가 경쟁자들을 제치고 962년 교황에 의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로 책봉되면서 유럽의 맹주로 부상한다.
신성로마제국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 점차 국력이 쇠잔하고 구성원 국가들 사이의 분열이 계속되면서 17세기부터는 껍데기만 남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가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인이 세운 것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는 유명한 독설을 퍼부은 것도 바로 이때쯤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름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똑같다. 한미 FTA는 그 이름과는 달리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양국간의 FTA가 진짜 자유무역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것은 경제학의 기초 상식이다. 우리가 한미 FTA를 체결해 미국산 자동차나 쇠고기에 대한 관세를 철폐한다면 이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독일 자동차나 호주 쇠고기에 대한 보호무역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유무역 신봉자가 아니지만, 자유무역이 좋다면 모든 나라와 하는 게 맞지 한 나라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든 교역국과 FTA를 체결하면 결국은 완전한 자유무역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협정을 수십 개의 나라와 체결하는 것은 협상 비용이 엄청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간 협정을 맺는 것이다.
미국은 양국간 FTA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깨는 것도 부족해서 한발 더 나아가 양국간 무역협정의 기본 원칙인 최혜국(Most Favoured Nation) 대우의 원칙마저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최혜국 대우는 협정 당사국들이 서로에 대해 제3국에 해주는 대우보다 더 나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번 협정에서 최혜국 대우는 지금까지 제3국과 맺은 모든 협정을 제외하고 작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한미 FTA는 FTA를 체결한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차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하는 것이 된다. 이쯤 되면 FTA라는 말이 부끄럽다.
한미 FTA가 ‘자유무역’ 협정이 아닌 또 하나의 이유는 지적재산권 문제이다. 특허를 비롯한 지적재산권 제도는 요즘은 당연시되지만 18~19세기 처음 도입됐을 때는 논란이 많았던 제도이다. 특히 특허제도의 도입을 반대했던 것은 자유무역론자들이었다. 그 당시 자유무역론자들은 특허라는 것은 인공적으로 창출된 독점이며, 따라서 무한경쟁을 전제하는 자유무역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히 학자들간의 논쟁으로 끝나지 않고 19세기 유럽 대륙에서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중심이 돼 특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이 특허반대 운동은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유무역정책을 추구하던 네덜란드는 그 영향을 받아 1869년 (1819년 도입됐던) 특허법을 폐지해 1912년까지 부활시키지 않은 일까지 있었다.
물론 특허제도가 기술혁신을 촉진해 가져오는 사회적 이득이 그 독점의 폐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믿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특허제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특허제도가 자유무역의 원칙에 벗어나는 인공적 독점의 창출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이 현재 한미 FTA에서 중점을 두고 추구하는 특허권의 강화, 특히 의약품 특허권의 강화 및 그 특허기간의 사실상 연장은 자유무역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한미 FTA는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다. 그리고 이 협정이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 밝혀졌다. 정부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한미 FTA-안보 연계론’마저도 미국에서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설득력이 없어졌다. 또 어떤 머리 좋은 분들이 어떤 핑계를 지어낼지는 모르지만, 이제 잘못된 길에 든 것을 인정하고 이 협상을 조용히 끝낼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