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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산책] 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일까?

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일까. 이에 관한 출판 관계자의 고백은 사뭇 놀랍다. 가을이면 날씨가 좋아 외출이 잦고 소풍이 빈번하기 때문에 여름이나 겨울보다 도서 판매율이 낮다고 한다. 부진한 판매율을 회복하고 급감하는 독서 인구를 회유하기 위해 내놓은 선전문구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었던 셈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최초의 책읽기는 수도사들의 성경읽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교회의 좁은 방 안에서 성경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단속하는 수도사의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독서가의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 독서란 책을 읽는 개인, 북적이는 군중을 떠나 외롭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혼의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마루야마 겐지가 소설가의 운명을 ‘좁은 방의 영혼’에 비유했듯이 독서는 작은 공간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반성하는 개인을 떠올리게 한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 오히려 독서의 적기로 여겨지는 까닭도 이에서 유래한다. 좁은 방과 내면, 개인이라는 용어를 생각한다면 최근 들어 독서 인구가 급속히 줄어든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간단한 검색을 통해 유포된 지식이 습득되고 다양한 커뮤니티가 익명의 군중을 양산하는 현실에서 개인이란 사라진 옛말처럼 아스라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일기를 작성하고 자학적 고백으로 블로그를 꾸미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가상의 공간을 유영하는 인터넷 유저들로 변질돼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만일 개인이라는 개념이 확고부동한 규정이라면 이제 더 이상 개인은 없는 것이고, 개인이 유동적인 개념일 수 있다면 ‘개인’은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이다. 내면적 사유나 개인의 반성으로서의 독서가 휘발되고 사라졌다는 점은 높은 판매율을 기록한 도서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도 드러난다. 최근 도서 판매 실적 1ㆍ2위를 점유하고 있는 ‘책’은 가벼운 일상사를 다루는 소설들이나 처세술이 대개이다. 그것은 ‘책’으로 출판돼 있으나 우리가 ‘책’에 대해 기대하는 전통적 아우라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정보들에 가깝다. 선별된 양피지에 붓으로 한자 한자 옮겨 적던 수제품이었던 ‘책’은 편리해진 컴퓨터 조판 앞에서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책읽기가 사라진 풍경은 지하철에서도 발견된다. 마주앉은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선택한 품목은 바로 핸드폰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투리 여가로 여겨졌던 출퇴근 시간은 이제 핸드폰으로 포화되고 말았다. 핸드폰으로 게임도 할 수 있고, 통화도 할 수 있고, 인터넷 검색까지 할 수 있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적 풍경이지만 길거리에 나뒹구는 종이조각까지 읽었다는 세르반테스의 일화를 생각해보면 변화는 절실해진다. 문명 사회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책’은 숭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숭배는 책이 지식의 보고이자 지혜의 예시라는 믿음의 반영이다. 보르헤스가 ‘도서관’을 통해 구현해낸 세계도,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가 무너뜨리고 싶어했던 권위도 ‘책’이 지닌 이성성과 내통한다. 이는 책읽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현대인들의 곤란 역시 읽은 것을 사유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됨을 암시한다. 독서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자를 추적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라 문자와 문자로 조형된 세상, 그리고 그 사이 행간에 은닉돼 있는 사유와의 접촉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이 곧 이성인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범람하는 책들 가운데도 여전히 진짜 책들이 있다고 믿는다. 구텐베르크 혁명을 지나 인터넷 갤럭시에 이른 책들의 범람 가운데서, 품위 있는 언어는 희소성으로 그 가치를 높인다. 올해가 가기 전 귀중한 한 구절 얻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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