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조중훈 한진명예회장 별세] 일대기

작은 거인 '정석(靜石)' 조중훈의 인생은 한국 물류산업의 성장사와 함께 하고 있다.아호인 '정석'은 조 회장이 어렸을 때 한번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성격인 데다 기계를 좋아해 이것저것 뚝딱거리고 어질러 놓기를 좋아해 선친이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관련기사- - - - - - - 이 같은 선친의 뜻은 조 회장의 인생 이력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해방 직후 트럭 한대로 창업한 이래 한진 그룹을 재계 6위의 기업으로 키워내는 왕성한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면서도 평생을 물류산업 '한우물'만 고집한 것. 평소 그는 사업 스타일이 보수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남이 땀 흘려 닦아 놓은 터에 뛰어들어 덤핑 경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창의적인 사고로 남보다 먼저 생각하고, 앞서가려고 노력하라"고 강조했다. 이는 '떡장수는 떡만 팔아야 한다'는 지론에서 잘 드러난다. ◇배짱으로 쌓아올린 초석=조 회장은 1920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15살 때 선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정규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진해 선원양성소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소 직공생활을 했다. 해방 직후 귀국한 고인은 25세때 인천에서 트럭 한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한민족의 전진'을 위한다는 뜻으로 회사 이름을 한진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당시를 '배짱과 허세로 사업을 키웠던 시절'로 회상했었다. 조 회장은 2년 뒤 화물자동차 15대를 보유하고 교통부로부터 경기도의 화물운송 면허를 정식으로 받을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막 발돋움하려던 한진상사는 한국전쟁으로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그는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2년 후인 1955년에 이전의 사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월남전 당시 미군의 군수 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한진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1966년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킨 이래 1971년 전쟁 종료 때까지 5년간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2,000만 달러. 64년 한국은행의 가용 외화가 4,70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 운'이라는 말을 대단히 싫어했다. 그는 '사업의 기본은 정확한 판단과 타이밍, 신용'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진은 1956년부터 주한 미군의 용역사업에 참여했는데, 어느날 임차해 쓰던 차량의 운전사가 미군의 겨울 군복을 트럭째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했다. 조 회장은 직원 한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켜 놓고 나도는 분실 물건을 일일이 돈을 주고 모두 사서 미군측에 납품했다. 물론 큰 손해를 보았지만, 미군들의 확고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후 월남 진출의 큰 자산으로 작용한다. ◇국내 최대 물류 기업으로 성장=1968년 대한항공(옛 항공공사) 인수는 조 회장으로서도 큰 전환점이었다. 본격적인 물류 기업으로 성장이 가능하게 된 것. 하지만 그는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에서 "'우리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인수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한해 1억원씩 적자를 내는 부실투성이였다. 조 회장은 하루 6시간 이상 자지 않고 사업에 몰두, 30년만에 소형 항공기 10여대로 출발한 대한항공을 세계 10대 항공사로 성장시켰다. 이는 정부의 독점 시혜도 컸지만 1979년 오일 쇼크로 왕복 항공유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첫 뉴욕 취향 비행기를 출발시키고, 출발 4시간 뒤 공급처를 확보한 일화에서 드러나듯 조 회장의 두둑한 배짱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항공분야에 만족하지 않고 1987년 당시 국내 최대의 선사였던 대한선주를 인수, 세계 5대 선사대열에 올려놓으면서 한진을 육ㆍ해ㆍ공 종합운송망을 갖춘 세계 유일의 그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민간 외교관 활동=그는 매사 국가 이익이 기업 이익에 우선한다는 생각에 국위 선양을 위해서 라면 바쁜 시간에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평소 기업인보다는 민간 외교관으로 불리는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여겼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몽골 등 외국으로부터 받은 민간인 최고 영예의 국가 훈장만도 9개에 달한다. 또 '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1973년 제3세계 국가들에 영향력이 큰 프랑스 인사들을 동원해 북한의 세계보건기구(WHO) 가입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중국과의 항공 교류를 통해 한ㆍ중 양국 관계 정상화를 앞당기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그가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4년부터. 한ㆍ일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英) 대장상을 만나 협력 기금 차관을 성사시켰다. 그는 경제계에서 유명한 지불(知佛) 인사로 꼽힌다. 1973년부터 한ㆍ불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두 나라의 경제 교류와 우호관계 증진에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세차례에 걸쳐 훈장도 받았다. 또 한ㆍ몽골 외교의 초석을 놓은 것을 비롯, 일본ㆍ중동ㆍ월남ㆍ대만 등과 민간 경제외교에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최형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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