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5월16일, 영국 의회가 곡물법 폐지안을 통과시켰다. 곡물법 폐지는 자유무역 체계를 낳고 양당정치 체제로 이어졌다. 마르크스도 곡물법 폐지를 자본주의 확산의 결정적 계기로 여겼다. 자본론의 한 구절. ‘곡물법 폐지는 토지귀족에 대해 산업자본이 거둔 승리의 마침표다.’ 1815년 제정된 곡물법의 골자는 농산물 수입 금지. 밀 1쿼터(약 12.7㎏)의 가격이 80실링을 밑돌 경우 외국산 밀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왜 만들었을까. 지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나폴레옹과의 전쟁 전까지 46실링 수준이던 밀 1쿼터 가격이 전쟁 중 177실링으로 올랐다가 종전 후 60실링으로 떨어지자 의회를 장악한 지주들이 고안한 고가격 보장장치가 곡물법이다. 당연히 반론이 들끓었다. 산업자본가들은 밀 가격이 오르면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진다는 점에서 곡물법 반대ㆍ폐지의 선봉에 섰다. 리카도(폐지)와 멜서스(존속)가 경제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것도 곡물법 논쟁을 통해서다. 말 많던 곡물법을 없앤 것은 기후와 선거권 운동.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해지고 선거권 제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자 로버트 필 총리는 지주계층이 많은 토리당 소속이었음에도 법 폐지에 앞장섰다. 총리에게 배반 당했다고 여긴 골수 토리당원들이 보수당으로 변신하고 토리당 내 곡물법 폐지론자들이 휘그당의 자유주의자들과 합쳐 자유당을 만든 게 현대 양당정치의 출발점이다. 농업관세를 철폐한 영국은 모든 부문에서 무역을 자유화시켰다. 자유무역의 시발점을 곡물법 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이라고 곡물법 폐지 당시와 다를 게 없다. 경쟁우위를 확보한 후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행태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저항도 닮은 꼴이다. 159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