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8월11일] <1471> YH사건


1979년 8월11일, 새벽2시 서울. 경찰병력 1,200여명이 마포 신민당사로 짓이겨 들어갔다. 목표는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가발업체 YH무역 여공 172명의 해산. 여공들이 왜 야당 당사에 들어왔을까. 수당도 없이 하루 14시간씩 일했으나 받지 못한 임금 지급과 회사 회생을 위해서다. 초고속 성장한 국내 최대 가발업체였으나 사주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회삿돈을 빼돌리고 YH 제품을 수입해 미국에 판매하면서도 대금을 치르지 않아 경영난 끝에 폐업을 맞자 여공들은 4월부터 투쟁에 나섰다. 폐업 철회와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여공들은 유신정권의 해산 압력이 심해지자 신민당사를 찾았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경찰의 진입 움직임에 여공들이 떨자 방패막이를 자처하며 총재실에서 밤을 지샜다. 자신이 있으면 경찰이 못 들어올 것이라던 김 총재의 생각은 바로 깨졌다. 해산작전에 나선 경찰은 2층 총재실의 벽을 부순 뒤 김 총재와 국회의원들을 끌어냈다. 다리가 부러지고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경찰에게 얻어맞은 의원도 있었다. 4층 회의실에서 농성하던 여공들에게는 더욱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진압과정에서 여공 김경숙(21세)이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의 와중에서도 작전은 30분 만에 끝났다. 경찰의 작전종료는 끝이 아니라 거대한 시작이었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 경찰을 비난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야당은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정치적 긴장은 김 총재의 의원직 제명과 부마항쟁, 10ㆍ26사태로 숨가쁘게 이어지며 유신정권을 끌어내렸다. YH사건은 노동운동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물결을 돌린 거대한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권력이 보다 이성적이었다면 그 생명은 연장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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