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28일] 한양천도


‘새 서울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를 이궁으로 삼았다(至新都 以舊漢陽府客舍爲離宮).’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 10월28일의 기록이다. 한양 천도의 주역은 태조 이성계. 개경의 지력이 쇠했다는 풍수지리설에 근거, 터전을 새로 닦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셈은 개경 일대 개국공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다. 민심도 두려웠다. 고려의 충신 최영 장군을 처형할 때 동맹 철시(撤市)하고 정몽주를 흠모하던 개경을 떠나고 싶었다. 이성계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낙향한 선비 72명이 조정출사를 재촉하며 마을을 불태우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불타 죽은 사건도 태조의 천도 의중을 굳혔다. 조선 개국(1392년 7월)과 동시에 시작된 천도 논의가 구체화한 것은 이듬해 1월. 첫 후보지 개룡산 일대에서는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는 이유로 10개월 만에 공사를 접었다. 하륜이 제시한 신촌과 연희동 등 무악 일대도 중신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천도작업이 번번이 제지되자 태조는 ‘고구려나 백제ㆍ신라가 도읍했던 곳이라도 가겠다’며 신하들을 다그쳤다. 한양이 도읍지로 정해진 것은 개국 2년 만인 1394년 8월. 정도전의 건의에 따랐다. 천도한 다음해에는 이름도 한양에서 한성부로 바꿨다. 왕자의 난 직후 왕궁이 개경으로 잠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한양은 조선왕조 내내 수도로 자리를 지켰다. 태조의 입경일인 10월28일은 정도(定都) 600주년인 1994년부터 ‘서울 시민의 날’로 내려온다. 한양 천도는 먼 옛날 얘기로 그치지 않는다. 현재진행형이다. 내년 대선 과정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둘러싸고 ‘사실상의 천도’라는 논쟁이 예상된다. 서울의 기능이 과연 바뀌거나 옮겨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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