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하면 500%가 넘은 고율 관세로 쌀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우리나라로서는 설상가상이다. 올해부터 쌀 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것도 농가에는 큰 타격인데 TPP 참여로 추가적인 부담을 더 질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쌀 문제와 관련해 우리나라가 일본의 TPP 참여조건을 좇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관측하고 있다.
정부 안팎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일본은 TPP 타결을 위해 협상 참가국들의 쌀에 저율할당관세(TRQ) 혜택을 부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1999년 시장을 쌀 개방한 일본은 현재 입찰을 통해 연간 77만톤의 쌀(관세율 0%)을 의무적으로 들여오고 있다. 쌀 시장을 일찍 개방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일본은 TPP 참여로 사실상 무관세로 쌀을 추가로 수입해야 할 처지라는 의미다.
일본 쌀 농가는 집권당인 자민당의 주요 표밭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99년 쌀 시장을 개방할 때도 TRQ 물량을 더 늘리지 않았다. 그동안 TPP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도 일본이 쌀과 보리·쇠고기·돼지고기·유제품·설탕 등 5개 품목에 대한 관세 유지를 주장한 것이 결정적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TPP 협상 타결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쌀 관세를 유지하는 대신 일부 물량에 TRQ를 적용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다.
일본이 회원국 쌀 수입물량에 TRQ를 적용하기로 하면서 TPP 참여를 앞둔 우리 정부도 고심에 빠졌다. 정부는 올해부터 쌀 시장을 열기로 하고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상 최대치인 513% 관세를 제시했다. 이는 쌀 시장을 먼저 개방한 일본·대만(290%)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TPP 협상 타결 후 참여하기 때문에 기존 12개국이 타결한 기준에 맞춰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게 큰 부담이다. 일본이 늘린 TRQ를 우리에게도 적용하지 않으면 협상이 진척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특히 우리 쌀 관세율이 높다고 WTO에 검증을 요청한 5개국 가운데 3개국(미국·호주·베트남)이 TPP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3개국은 쌀 관세율을 인하하거나 TRQ 물량 확대를 요구할 것은 불문가지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문제는 정부가 TPP 협상에서 쌀 시장을 양보하면 국내 농가의 심각한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TPP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효과를 얻기 위해 쌀 일부를 TRQ로 더 줘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 등 TPP 주요국과 FTA를 체결한 상황이어서 FTA 지진아인 일본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는 없다. 만약 TPP 참여 과정에서 쌀을 양보한다면 농가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국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협상에 참가한다면 쌀 부분이 가장 관건이 될 것"이라며 "쌀 TRQ를 더 주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수 있고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TRQ를 더 열 것으로 알고 있고 우리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며 "쌀은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정무적인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