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 시각 벗어나야
미국·영국 등 일부 빼곤 세계 곳곳 한국식 경영
규제보단 자율 맡기고 독과점 폐해 차단 집중
기업 발목 잡지 말아야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미국 포춘 발표) 아시아 1위는 단연 일본의 도요타다. 명성에 걸맞게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도요타지만 한국 정부ㆍ정치권의 시각에서 보면 '그저 나쁜 재벌'일 뿐이다. 작은 자본으로 순환출자를 통해 대기업집단을 지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도요타 가문은 10% 미만의 지분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 계열사 간 환상형 순환출자도 갖추고 상호출자도 활용하는 등 말 그대로 개선돼야 할 '재벌의 표본'인 셈이다.
프랑스의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도 우리 눈으로 보면 비난의 대상이다. 60여개의 계열사를 갖추며 세계 명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 그룹도 정부ㆍ정치권이 후진적 지배구조로 지목하는 순환출자와 상호출자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한국 대기업들이 오너의 적은 지분으로 순환출자와 상호출자를 활용해 '비정상적 인 지배구조(거버넌스)'를 갖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를 놓고 후진국형 지배구조라며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악(惡)'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 지배구조가 뭐가 좋고, 뭐가 나쁘다는 획일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지배구조는 시장 자율에 맡기고 시장독과점 폐해와 경쟁제한적인 행위를 규율하는 방향으로 정책역량을 몰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ㆍ정치권, '기업 지배구조 정답 있다'고 착각=정부는 현재 범부처 차원에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태스크포스를 발족해 세부안을 논의하고 있다. 태스크포스의 한 관계자는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전환 유도, 오너형 경영구조 개선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경제민주화의 한 축으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이면에는 우선 대기업들이 구조적으로 비정상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대기업의 지배구조는 기형적 형태이고 경쟁력 집중의 원인이며 이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로 바꿔야 한다는 게 논리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박근혜 정부만이 내놓은 것이 아니다. 역대 정부들의 단골 메뉴였다. 출자총액제한제를 1986년 12월에 도입했다가 1998년 2월에 폐지하고 2001년 4월에 재시행하는 등 폐지와 시행을 거듭해왔다. 지주회사제도 역시 1986년 12월에는 금지했다가 1999년 2월 제한적 허용으로 바뀌었고 2007년 11월부터는 전환 장려로 옷을 갈아입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과거에는 지배구조 개선 초점이 기업의 비효율 개선에 맞춰졌다"며 "최근에는 지배구조가 불완전하다고 보고 이를 개선하는 것이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역대 정부들이 지배구조 개선을 핫이슈로 내세우는 또 다른 이유는 재벌 손보기 외에도 '지배구조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한마디로 현재의 시스템은 후진국형이며 지배구조에 영미식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정답이 있다는 게 그것이다.
◇한국형 지배구조 세계 도처에 산재, '정답은 없다'=이 같은 인식에 대해 김정호 고려대 법대 교수는 "시장에 영원한 승자가 없듯이 기업 지배구조에도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경제민주화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고 있는 순환출자 역시 보다 균형적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한때 미국과 영국의 주주 자본주의 기업 형태가 글로벌 스탠더드이고 한국식 피라미드 기업집단은 개발도상국에나 존재하는 예외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었다. 하지만 21세기를 전후해 기업 형태에 관한 국가비교 연구가 이뤄지면서 이 같은 인식은 이제 낡은 유물이 됐다.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한국식 지배구조, 즉 출자구조로 연결되고 지배주주의 통제를 받은 형태의 기업집단이 미국ㆍ영국 등 일부를 제외하고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랜달 모크와 같은 일부 경제학자는 오히려 영미형 기업조직이 예외적 형태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도요타는 물론 대다수 기업이 한국의 지배구조와 별반 차이가 없다. 프랑스 등 유럽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신기한 것은 이들 국가에서 순환출자 등을 규제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가 없다는 점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의 초기 모델로 삼았던 일본에서도 출자구조 또는 출자방향에 대해 사전 규제가 전혀 없다는 점을 정부ㆍ정치권이 인식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미국의 대표 기업인 GE는 우리나라의 '그룹 구조조정본부' 같은 조직을 두고 있다. 워낙 사업이 커지다 보니 한국의 구조본 같은 '전략실(general office)'을 운영하는 등 다종다양한 지배구조가 글로벌 대세로 자리잡은 것이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배구조는 기업들이 처한 상황과 사업전략, 그리고 시장여건에 맞춰 자율적으로 선택, 발전시켜나가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국 A기업이 자율적으로 지배구조를 선택했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시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우리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기업 오너와 효율성 높은 전략조직이 결합된 리더십을 구축해 일본 기업을 따라잡았다"면서 "중국ㆍ인도와 같은 신흥시장 기업은 물론 일본과 서구 기업들이 한국식 경영 스타일을 배우고 있다"며 일련의 논의가 기업의 발목을 잡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