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에 숨이 막힌다. 유학과 연수에 쓴 비용이 17년간 350억달러, 이공계 유학생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하지 않고 눌러앉는 비율 47%, 사교육비 총액 21조6,259억원….
하나같이 어두운 소식이다. 통계를 한 겹만 벗겨보자. 우리나라가 지난해 미국과 무역에서 거둔 흑자는 71억8,000만달러. 많이 남긴 것 같지만 10만3,889명 한국 유학생들의 지출 추산액인 50억달러를 통계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여기에 영업이익률 개념을 더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들의 지난해 영업이익율은 6.94%로 만원 매출을 올려 평균 694원을 남겼다. 무역수지 흑자는 개념상 매출액에, 유학비용은 순이익에 가깝다. 무역수지 흑자의 70%를 유학비용으로 썼다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돈과 부가가치의 실질적 흐름을 따져보면 우리가 훨씬 더 적자다.
현실은 통계보다 암담
현실은 더 암담하다. 귀국을 꺼리는 해외 이공계 인력 비율이 10년 동안 두 배 이상 높아졌다는 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미국에서 통할 수 있을 만큼 유학생들의 실력이 높아졌든지 삶의 터전으로서 고국의 매력이 떨어졌든지. 전자라면 국제수지를 떠나 환영할 일이지만 과연 그럴까. 뚜렷한 일자리도 없이 해외에 남은 유학생 출신들이 집에 손을 벌린다. 국부유출도 당연히 늘어난다.
국내 학생,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이런 구조적 모순에 노출돼 있다. 정부 통계로만 21조원이 넘는 사교육비를 부담하는 부모들은 너나없이 아이의 유학과 성공을 바라지만 해외에 나가는 학생은 여전히 소수다. 유학생 중에서 또 소수만 해외취업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결국 거대한 사교육 시장의 정점은 해외기업이며 한국의 사교육비는 외국을 위한 기초공사에 투입된다는 얘기가 된다.
유학생끼리의 현지 경쟁에 탈락한 차상위 그룹은 국내 대학과 기업 등의 문을 두드리지만 공급이 넘친 지 오래다. 경쟁에서 처진 그룹은 해외파 백수로 남는다. 일부는 배운 대로 유학원을 차리다 보니 대치동에만 있던 유학원이 강남 전역과 중계동, 신도시를 넘어 이제는 지방 중소도시에까지 들어서 있다.
언제쯤이나 이런 악순환 구조에서 벗어날까. 폐해가 중증으로 번지고 열풍의 관성까지 소진했을 때 가능하다.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돈이 빠져나가고 부작용이 확산될지는 생각만 해도 어지럽다. 해결책은 없을까. 원점에 길이 있다고 믿는다. '중국 우주개발의 아버지'라는 고 첸쉐썬(錢學森) 박사를 떠올려보자. 30대 중반에 미국에서 대령 대우를 받는 최고 과학자였던 그는 5년간의 가택연금과 방해를 뚫고 1955년 가까스로 중국 땅을 밟은 인물. 유인 우주선까지 발사한 중국의 우주기술에는 조국에 대한 그의 헌신이 베어 있다.
중국인들은 지난해 사망한 그를 존경해마지 않는다. 국가가 주는 부와 영예와 특전을 거부한 채 검약한 생활로 연구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장개석의 수석 국방참모인 부친과 일본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의 유명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던 첸 박사의 부인도 화려한 사교계를 떠나 중국에 돌아와 남편과 단칸방에서 지내며 후학을 길렀다. 우리에게 이런 해외파가 있었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파격적으로 유치했던 과학자들의 상당수는 다시 돌아가 버렸다.
첸쉐썬 같은 해외파 길러야
상반된 두 사례가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다.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빠지는 시대에 고작 나오는 교육개혁이라는 게 교육공무원들을 윽박질러 국민들에게 공감을 선사하는 정도다. 위에 있는 자는 고치기 싫고 중간은 제 위치도 모른 채 다리가 찢어지게 쫓아가며 기층민들은 포기해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다. 망국적 교육구조라는 표현이 과하다고 책망하지 마시라. 그보다는 교육에 '나라와 우리'를 생각하는 이념(-ism)과 뜻을 넣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