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학술회의조차 힘들어 “망신”김영삼 정부 들어 5명의 과기처 장관이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근무하면서 설립한 연구기관들이 과기처의 관료주의와 연구기관의 미숙한 행정 그리고 전직 장관들의 중복된 사업 추진으로 발목이 잡혀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특히 김시중 장관 때 APEC(아·태 경제협력체)으로부터 유치한 아태이론물리연구센터(소장 조용민)는 정근모 장관이 설립한 세계 석학의 요람인 고등과학원(원장 직대 명효철)과 연구영역이 비슷하여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유치한 최초의 국제 연구기관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물리학자들의 공동 연구공간으로 기대를 모으던 아태이론물리연구센터가 제 구실을 못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아태이론물리센터의 고위 당직자는 『과기처가 아직까지 올해 예산(10억원)을 주지 않아 연구와 행정 기능이 사실상 마비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센터가 24일부터 서울에서 국제 핵물리학 학회를 열지만 당장 강연자들에게 줄 비행기삯도 없다』며 『유수한 해외 과학자들을 초청해 놓고 오히려 한국이 망신만 사게 될 지경』이라고 한탄했다.
이에 따르면 과기처는 지난해 센터에 대한 예산 집행을 질질 끌며 미루다가 연말에 겨우 집행했다는 것. 또 지난 8월까지는 지난해 예산으로 겨우 버텨왔지만 9월 들어 이마저 바닥나 이달 들어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는 것이다.
센터는 9월부터 이달까지 두달동안 각계에서 긴급하게 모금한 돈으로 급한 곳만 지출하고 있으며 센터 연구원에게 두달치 봉급조차 주지 못하고 있다.
센터의 한 연구원은 『지난 20일이 월급날이었지만 역시 빈봉투 뿐이었다』며 『생활유지는 물론 가장의 위신마저 사라졌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어 『지난 8월부터 전세금을 내지 못해 초빙연구원 기숙사에 전기마저 끊어졌다』며 『국내 연구원들은 센터의 사정을 이해하며 참고 있지만 어렵게 확보한 외국인 연구원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에 대해 과기처 당직자는 『아태센터가 사업계획서를 늦게 제출해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계획서 평가가 끝나는대로 예산을 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센터측은 『지난해에도 그랬듯이 계획서를 제출해도 과기처는 사소한 문제를 트집삼아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고 비난했다.
센터측은 이같은 「과기처의 아태센터 발목잡기」가 정근모 장관의 고등과학원에 대한 지나친 편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정장관이 설립한 고등과학원이 아태센터와 연구영역이 겹치자 정장관의 뜻을 받든 과기처 일부 직원들이 고등과학원을 키우기 위해 일부러 아태센터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주장이다.
과기처 당국자는 이에 대해 『누가 어렵게 유치한 국제기구를 망치고 싶어하겠느냐』며 『아태센터의 미숙한 행정 처리를 엉뚱하게 과기처에 돌리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센터측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네스코가 각각 최근 아태센터를 자기네 산하기구로 넣어 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며 『이들의 산하기구로 들어가면 국제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도 과기처가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며 거절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당장 24일 열리는 국제학회 때문에 은행에서 빚이라도 얻어 쓸 생각이다』며 『과기처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해 달라고 바라지도 하지 않는다. 제발 배정된 예산만이라도 쓰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김상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