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1일] 루이 16세 처형

[오늘의 경제소사/1월21일] 루이 16세 처형 유효투표 721표 중 무죄 334표, 유죄 387표. 53표 차이로 루이 16세의 반역혐의가 사실로 판정됐다. 프랑스 국민공회의 표결 이튿날인 1793년 1월21일, 루이 16세의 목이 잘렸다. 단두대에 선 루이 16세는 '내 피가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해주기를…'이라는 말을 남겨 일말의 동정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우유부단했지만 천성이 착해 입헌군주로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가 기요틴의 제물이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재정위기 탓이다. 오스트리아 공주 출신으로 가장 아름다운 왕비로 꼽혔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벽은 배를 곯던 국민을 자극했다. 루이 16세의 실정은 대부분 그녀의 베갯머리 송사에서 나왔다.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프랑스에 쳐들어와 구해달라'고 간청한 왕비의 편지도 국민을 격분시켰다. 재정난은 보다 심각했다.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의 값싼 상품이 들어와 프랑스 산업은 위기에 빠지고 생필품 가격이 올랐다. 파리의 실업률은 50%로 치솟았다. 재정을 회복불능 상태로 악화시킨 결정타는 20억리브르가 들어간 미국 독립전쟁 지원. 국가부채는 45억리브르로 불어났다. 세입 총액이 5억리브르 남짓하던 시절이다. 재정지출의 절반 이상이 빚잔치에 들어가자 루이 16세는 귀족에 대한 면세특권 폐지와 과세 평등을 시도했으나 왕비와 귀족의 반대로 무산됐다. 귀족계급 중에서도 오늘날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던 고등법원의 반대가 심했다. 재정개혁 실패는 피를 불렀다. '빵을 달라'는 아낙네들의 행진에 이어 바스티유 감옥이 불탔다. 앙시앵레짐(구질서)도 무너졌다. 루이 16세의 피는 '자유ㆍ평등ㆍ박애'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입력시간 : 2005-01-2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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