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금융권 고위공무원들이 그리스 부채탕감 문제에서 헤지펀드의 손에 놀아났다. 그들은 눈뜬 장님이었다.' (뉴욕타임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금융권 수장들이 그리스의 부채탕감을 위해 낮은 가격에 국채를 환매(buy-back)할 수 있도록 한 정책을 앞뒤 재지 않고 밀어붙인 결과 헤지펀드들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고 23일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발단은 지난달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도이체방크의 하칸 볼린 상무는 올리 렌 유럽연합(EU) 경제ㆍ통화담당 집행위원에게 e메일을 보내 "막대한 부채에 허덕이는 그리스가 과거에 판매했던 국채를 낮은 가격에 환매해 부채가 감축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관투자가는 납세자의 손실을 원하지 않으니 기관투자가가 보유한 그리스 국채보다는 헤지펀드 등 민간투자자가 보유한 것에 집단행동조항(CAC)을 적용하자"고 구체안을 내놓았다. CAC는 국채보유자의 대다수가 찬성하면 만장일치가 되지 않아도 일괄판매가 이뤄지는 안이다. 볼린 상무는 "헤지펀드들이 되사기의 적정가격으로 국채 액면가 1유로당 34~35센트선을 지지하나 EU 차원에서 28~30센트선으로 압박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볼린 상무가 내놓은 안은 대다수 헤지펀드들의 그리스 국채매입 가격을 간과했다. 씨티그룹이 그렉시트(Grexitㆍ그리스의 유로존 이탈) 가능성을 90%로 점치는 등 그리스를 둘러싼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 여름 헤지펀드들은 오픈마켓에서 오히려 그리스 국채를 낮은 가격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리스 국채를 액면가 1유로당 12~13센트에 집중적으로 수매했고 그 결과 가을에는 가격이 두 배인 25센트까지 뛰었다.
문제는 EU가 이 같은 사실을 몰랐거나 알면서도 무시했다는 점이다. 다만 EU는 그리스가 연간 재정적자 감축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그리스 위기가 이탈리아 등 주변국으로 번질 가능성만 우려했다. 그 결과 EU는 헤지펀드들이 매입한 가격보다 높은 가격에 국채를 되사는 안을 추진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이 같은 소문이 퍼지자 헤지펀드들은 앞다퉈 그리스 국채환매에 참여했고 결국 지난 12일 당초 그리스의 예상치인 300억유로를 넘어 총 310억유로 규모의 국채 되사기에 응했다. EU가 염두에 둔 CAC를 발동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스는 액면가 1유로당 33센트에 국채를 되샀고 지난 여름 그리스 국채를 샀던 헤지펀드들은 최대 170%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다. NYT는 그레이록캐피털ㆍ퍼트리ㆍ브레반호워드 등이 최소 100% 이상의 수익을 남겼다고 보도했다. 듀크대 로스쿨의 미투 굴라티 국채전공 교수는 "유럽은 20억유로를 낭비했다"고 지적했다. NYT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유럽 재정위기국의 위기타개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