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6년 10월 어느 날. 중견기업 A사에 중동에서 영문 팩스가 한장 들어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자가 운영하는 에이전트에서 A사를 사우디의 대규모 발전소 입찰에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A사는 들뜬 마음에 사우디 왕자가 운영한다는 에이전트와 접촉을 시작했고 세차례에 걸쳐 수십만 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했다. 그러나 팩스가 온지 정확하게 6개월만에 A사는 입찰에 떨어졌고 에이전트와는 연락이 끊겼다. 중동지역에만 수백개에 달하는 국제 사기단에 당한 것이다`
중동은 결코 단순한 시장이 아니다. 중동시장 진출을 위한 키워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백전 백패다. 중동은 왕족 중심의 파워엘리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들과 줄이 닿는 유력 에이전트를 통하지 않으면 수출은 꿈에 불과한 곳이다.
◇정ㆍ경일치와 이슬람문화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레이트를 제외한 모든 중동 국가들의 최대 구매처는 정부와 공기업이다. 대규모 공사 역시 국영기업에서 발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최종 결정권은 사실상 정치권이 갖고 있다.
그러나 수출기업이 중동 국가의 최고권력 집단과 직접 교류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연히 현지 에이전트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대부분 중동 산유국들은 법으로 해외법인이 수출이나 공사 입찰에 참여하려면 현지 에이전트를 통하도록 정해 놓고 있다.
홍성문 중동경제연구소장은 “A사의 경우처럼 중동의 메커니즘을 모르면 사기당할 확률이 높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지 법인을 설립하거나 현지사정에 밝은 직원을 직접 파견해 유력 에이전트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이슬람 문화권인 중동 국가들은 비즈니스보다 인간적인 교류를 우선시한다 점을 명심해야 한다. 면대면(面對面)접촉을 중시하며 이슬람교에 바탕을 둔 형제애(Brothership)가 없으면 수출상담은 물거품이 되는 수가 허다하다.
중동의 물류중심지인 아랍에미레이트 바이어들은 비즈니스 얘기만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돈만 아는 장사꾼과는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별 전략적 접근 필요=중동은 각 국가마다 독특한 경제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홍희 KOTRA 해외조사팀 차장은 “우리 기업들이 중동지역의 국가별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해 사우디아라비아ㆍ아랍에미레이트 등에 집중된 교역국 범위를 넓힌다면 미국,일본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테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동 교역국가 중 15ㆍ16위를 차지한 리비아와 시리아처럼 공급에 의해 수요가 창출되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국가들을 수출 타겟 국가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홍 차장은 “리비아나 시리아 같은 국가에서는 공급에 의해 수요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공급 부족현상이 나타난다”며 “이들 국가에서 우리 제품의 수요창출이 시작된다면 장기적으로 큰 공사를 하나 따내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출상담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우디 바이어들은 이메일이나 팩스 접촉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홍 차장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중동에 대한 풍부한 사전 정보를 통해 국가별 접근 전략을 짜야만 제2의 중동특수에서 우리의 몫을 많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ㆍ관 합동의 시장 접근 프로그램 필수적=우리 기업들의 중동 진출을 위해서는 발주기관의 최종의사 결정권자 접촉과 홍보활동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대부분 왕족인 이들을 기업이 독자적으로 접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중동진출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민ㆍ관합동의 중동 시장 접근을 위한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하다.
전문가들은 또 “지난 70ㆍ80년대의 경험을 살려 해외프로젝트 입찰시 국내 업체간 사전 조정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플랜트 혹은 건설공사 입찰시 국내업체간 과도한 경쟁으로 저가입찰에 따른 폐해는 물론, 국가 이미지까지 손상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홍 소장은 이와 함께 “정부가 발주 책임자나 입찰관계자 등을 초청, 산업시찰 등을 통해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력을 과시해야 한다”며 “정부와 기업이 합동으로 수주외교를 펼쳐야만 `제2의 중동특수`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경제 부흥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동수기자 best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