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국가 시스템 개조하자] 6부. 백년대계 교육이 열쇠다 <4> 교육 정상화 첫 걸음, 진로교육

학벌에만 매달리면 희망 없어…직업체험 통해 '끼 찾기' 도와줘야<br>직업교육프로 수요 많지만 대부분 일회성이벤트 그쳐<br>지역사회-교육기관 연계, 인센티브등 다양한 지원을<br>"좋은 대학가면 성공한 인생"… 학부모 인식 변화도 필요

지난 5월 연희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은행에서 직업체험교육을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직업체험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학부모의 인식 변화, 학벌 중시 분위기 타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제공=하나은행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하루 종일 강의만 들어서 지루하고 재미없었어요."

지난 4월 서울시교육청에서 실시한 '중1 진로탐색 집중학년제' 과정의 직업체험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중1 학생들은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직업체험이라는 말에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자에 멍하니 앉아 강의만 듣고 나왔다. 학생들은 "평소 학교에 있을 때와 뭐가 달라진 건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들이었다. 체험을 제공하는 기관들도 한숨을 내쉬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업무가 많은데 학생들의 방문으로 기관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한 기관 관계자는 "우리처럼 규모가 작은 곳은 이런 프로그램이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직업체험만을 전담으로 담당하는 직원을 뽑지 않는 이상 이 프로그램이 상설화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들 교육의 세 단계를 '진로-직업-평생교육'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학창 시절 학생이 스스로 적성과 재능을 발견해 삶의 방향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로교육이라면 이를 바탕으로 직업을 선택해 직무 관련 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직업교육을 통해서다. 마지막으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일찌감치 무너진 시대에 직장을 다니면서 제2의 인생설계를 준비하는 과정이 바로 평생교육이다.

기대수명이 연장되고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기업들이 앞다퉈 사내대학 설립에 나서는 등 평생교육에 대한 개념은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진로ㆍ직업교육 체계는 해외 선진국에 비해 한참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학교 교육과정에 진로ㆍ직업교육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우리만큼 입시경쟁이 치열한 이웃나라 일본도 지난 2005년부터 '커리어 스타트 위크'라는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이에 반해 '좋은 학벌=좋은 직장'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지배해온 우리 사회에서 진로교육이 숨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입시경쟁 체제를 비집고 들어올 틈은 별로 없었다.

2009년 한국 정부는 뒤늦게 창의적 체험활동을 중등교육과정에 처음 도입하면서 여기에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수업일수나 기준 등이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천차만별로 운영되면서 참여율은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직장체험을 경험한 중고생은 전체 학생 376만여명 중 16.9%(63만여명)에 불과했으며 대학이나 특성화고를 활용한 학과체험 경험 학생도 8.5%(32만여명)밖에 안 됐다. 이마저도 하루 또는 반나절 과정의 이벤트성 체험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 입시와 상관없이 숙련 기술인을 양성하기 위한 직업교육의 참여도 미미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007년부터 특성화고ㆍ마이스터고 재학생은 물론 일반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명장 특강, 현장체험 등의 '청소년 직업 진로지도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전체 초중고생 672만여명 중 이 교육을 받은 학생 수는 4.3%(29만여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무늬만 직업교육'에 가까운 형식적 지도가 계속되자 학생들이 동경하는 장래 직업의 종류도 획일화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시행한 장래 희망직업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과 중학생ㆍ고등학생들이 각각 꼽은 10대 선호직업 중 무려 5가지가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선호 직업은 교사ㆍ의사ㆍ연예인ㆍ요리사ㆍ경찰 등이었다.


청소년들이 보고 배우는 직업 자체가 매체를 통해 접하는 연예인이거나 일상에서 접하는 교사 혹은 의사 정도로 한정되다 보니 다양한 꿈을 그릴 기회조차 일찌감치 봉쇄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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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학생들의 꿈에 대한 갈증은 직업교육에 대한 수요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일반계 고등학생과 중학생 각각의 직업체험 희망 비율은 무려 72.6%, 80.2%에 달했다.

이처럼 분출하는 학생들의 수요를 직업교육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정부도 대책 마련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교육부는 올해 진로진학상담교사를 850명 늘리고 모든 중고생에게 연 2회 이상의 진로검사와 상담을 필수화하는 등 진로ㆍ직업교육을 활성화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교육부는 오는 9월부터 자유학기제를 일부 중학교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2016년도부터는 전면적으로 도입해 학생들에게 진로교육과 직업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우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올해 서울시교육청의 직업체험 프로그램인 '청진기'에 참가했던 한 기관의 관계자는 "아이들에게 직업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오늘 하루 동안 다른 업무를 전혀 보지 못해 곤혹스럽다"며 "아이들이 할 만한 프로그램을 짜느라 일주일 전부터 업무에 지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박종효 건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재 초중고에서 진로교육이나 자유학기제에 대한 이야기를 산발적으로 하고 있는데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없다"며 "거대 담론만 존재할 뿐 구체적으로 일선 학교에서 누가 주체가 돼서 무엇을 어떤 식으로 할지에 대한 방안이 없어 전체적으로 추진이 늦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직업교육이 뿌리내리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지역사회와의 연계 시스템 구축을 꼽는다. 교육 당국이 학생들의 진로ㆍ직업탐색 프로그램을 마련해도 지역 산업계의 비협조로 상시적이고 지속적인 교육과 체험이 불가능하다면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손유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학생들을 지도할 여건이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사업장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직업교육 안착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일터의 발굴"이라며 "일회성 이벤트로 전락하지 않도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연계해 각종 인센티브 제공 등의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학벌사회 타파와 학부모의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승보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진로직업정보센터장은 "일단 좋은 대학에 가면 성공한 인생이니 공부부터 하라고 강요하는 학부모들의 왜곡된 진로교육이 문제"라며 "갈수록 다양해지는 시대적 패러다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식 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정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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