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떠나고 있다. 최근 수년간 기업들의 `탈한국 러시`가 일면서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거나 검토해 보지 않은 업체는 거의 없을 정도다.
서울경제신문이 최근 60개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업체의 78.3%에 해당하는 47개 기업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등 현지 투자지역의 노동환경이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는 데에는 국내 노동환경의 악화가 큰 이유라는 사실이 다시금 입증된 것이다. 조사대상 기업들은 투자대상 지역의 노동법 등 전반적인 노동환경이 한국보다 낫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현지의 노사관계가 투자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외 노동환경 `국내보다 좋다`=이번 조사에서 기업들은 해외의 노동환경이 국내보다 좋은 점으로 `임금인상 등 노동자 요구가 적다(57.1%)``현지 정부의 기업보호정책이 있다(21.4%)``노동법등 법제도 환경이 좋다(14.3%)`등을 꼽았다. 기업들은 또 해외투자 결정시 현지 노사관계를 고려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감안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응답업체의 85.7%가 `현지 노사관계를 고려한다`고 답변한 반면 `노사문제와는 관계없다`는 업체는 14.3%에 지나지 않았다. 또 80% 이상이 앞으로도 `현지 노사문제를 적극 고려하겠다`고 응답했다.
최근 북한 핵문제 등 불투명한 한반도 정세에도 불구, 개성공단 입주 희망기업들이 몰리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된다. 섬유산업연합회가 지난해 12월 13일 접수한 개성공단 입주 의향을 가진 섬유업체는 174개로 지난 2000년보다 40개사가 늘었다. 지난 11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현대아산에 접수시킨 대북투자 희망업체는 700개사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섬유, 의류, 신발, 가방, 전기, 기계분야의 중소규모 기업들로 현지의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골치 아픈 국내 노사문제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속내를 갖고 있다.
◇국내 노동정책 불신도 큰 이유=기업들이 한국을 떠나는 배경에는 국내 노동환경이 급속히 친노동자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인식도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 5년간 DJ정부 아래서 국내 노동정책이나 노동법 등 관련 법규가 노동자편에 유리하게 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번 조사에서 전체 응답업체의 63.1%가 `현재 정부의 노동정책이나 노동관련 법규는 노동자편`이라고 답변한 반면, `노사중립적(26.3%)`이나 `사용자편에 유리하다(10.5%)`고 응답한 업체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5년간 노동관련 법제나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전체의 73.7%가 `노동자편에 유리하게 변했다`고 답변했으며, `노사중립적`이거나 `사용자편에 유리해졌다`고 응답한 업체는 26.3%에 불과했다.
최근 중국 투자를 결정한 한 직물업체 사장은 “사실 낯설고 물설은 중국 현지에 투자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며 “하지만 매년 터져 나오는 임금인상, 사내 복지 확대 등 강경한 노조 요구와 정부의 친노동자적 정책 변화에 더 이상 망설였다간 경쟁력을 잃고 말겠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새 정부, 공정한 노동정책 기대=기업들은 내심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출현에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 5년간 기업보다는 노동자편에 유리한 노동정책이 시행돼 온데다 새 정부의 친노동자적 성향으로 노동환경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기업들은 바람직한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서 정부의 합리적인 노동정책과 노사중립적인 법제도 환경을 정비해 줄 것을 기대했다. 특히 노조의 불법 노동운동에 강력 대처하는 등 법과 원칙을 준수하는 노사관행을 수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전체 응답업체의 34.2%가 `정부의 공정한 노동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주문했으며, `불법파업에 대한 강력 대응(21.1%)``상급 노동단체의 개입을 배제하는 자율적 노사관계 유도(15.8%)``노동정책의 일관성 유지(13.2%)``노동관계법의 중립적 개정(10.5%)`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원덕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노사문제로 인한 기업의 해외 이탈과 사회ㆍ경제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공정한 법치의 수립이 시급하다”며 “노사 양측이 공감할 수 있는 법적ㆍ제도적 틀을 만들어 노사분규가 기업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관리하는 사회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b)제조업 공동화 `현실로(/b)
“이제 한국에서는 더 이상 사업할 수 없다. 한국에 있는 모든 생산시설을 중국 등 해외로 옮겨가는 게 차라리 낫다.”
지난 2001년 화섬업계의 노사분규가 극에 달했을 때 효성의 조정래 전 사장이 노조의 불법파업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당시 울산지역에 있는 효성, 고합, 태광산업 등의 화섬노조는 회사측이 추진하는 구조조정에 맞서 4개월동안 공동연대파업을 벌였다.
이미 전세계적인 공급과잉으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던 화섬업체들에게 구조조정을 하지 말라는 것은 공장 문을 닫으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실제로 이들 업체들은 파업사태이후 중국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며 새로운 생산기지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효성은 지난해부터 국내 신규투자는 전혀 없이 중국 투자에만 집중하고 있다. 효성은 중국 저장성에 2억달러이상을 투입, 연 8,000톤 규모의 스펀덱스 공장, 연 1만1,000톤 규모의 타이어코드 및 산자용사 공장, 연1만5,000톤 규모의 폴리에스터 및 스틸 타이어코드 공장 등을 짓고 있다. 이들 공장은 모두 올 4월에서 10월까지 준공을 마치고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다.
이 밖에 코오롱(타이어코드), 휴비스(폴리에스테르 단섬유), 태창(면직물), 도레이새한(부직포), 태광산업(스판덱스) 등 대부분의 섬유업체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결정했거나 검토중이다.
이들 기업들이 모두 노사분규 때문에 해외 투자를 추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국내 노사문제는 인력확보나 인건비 문제, 시장선점이나 수요창출 등 경영전략적인 문제들과 함께 이미 기업들의 해외 투자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인 된 지 오래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까지 국내 제조업의 해외투자는 1,158건으로 2001년 같은 기간에 비해 17% 증가했다. IMF환란 이후 제조업을 포함한 전산업의 해외진출은 98년 608건에서 2001년 2,091건으로 무려 3배이상 급신장했다.
이에 따라 제조업 공동화에 대한 우려가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2001년 국내 제조업의 해외투자는 36억달러인데 반해 외국인의 국내 제조업투자는 25억달러로 들어온 돈보다 나간 돈이 더 많았다. 이 같은 추세가 몇 년간만 더 지속되면 국내 제조업 기반이 송두리째 뽑히고 말 것이란 게 업계의 지적이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제조업의 공동화는 고비용ㆍ다규제로 표현되는 국내 기업환경의 악화가 주요인이지만 호전적인 노조와 반기업적인 사회정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차기 정부에서도 노조의 과도한 요구가 계속되고 노동쟁의의 준법화가 확립돼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의 탈한국 엑소더스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b)"분규나면 회사 문닫을판"
중소기업일수록 위기감(/b)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직물 포대 생산업체 진양은 지난해 봄 베트남 투자를 결정했다. 새한, 휴비스, 태광산업 등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이 회사는 북한 개성공단이 열리는 대로 북한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인건비, 물류비가 쌀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골치아픈 노사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계산이다. 개성공단 진출이 성공하면 평택공장을 폐쇄하고 생산설비를 모두 개성공단에 이전할 방침이다.
중소기업들에 있어 노사문제는 치명적이다. 파업이 자칫 장기간 분규로 이어질 경우 회사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경영주들의 노조에 대한 불신 및 이해부족과 함께 과도한 임금인상, 구조조정 반대 등 노조의 상식을 벗어난 무리한 요구 역시 기업들을 해외로 내모는 주요 원인임에 틀림없다.
최근 정부 발표에 따르면 기업들의 해외투자는 금액면에서 줄어들고 있으나 건수면에서는 증가하고 있다. 이는 최근의 해외투자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 9월까지 대기업들의 해외 투자는 21억6,000만달러로 전년도의 47억5,000만달러에서 48.1%나 줄어든 반면 중소기업들은 12억9,000만달러를 기록, 전년도에 비해 34.4% 늘었다. 투자지역도 미국ㆍEU에서 중소기업들이 선호하는 중국, 베트남 등으로 변했다.
박성철 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은 “최근 인력난, 고임금, 노사분규 등에 치인 중소기업들이 해외투자를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며 “중소기업은 대형 제조업을 지원하고 고용기반을 확대해 주는 우리 산업의 실핏줄인 만큼 이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잇는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easter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