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조선인물화가 채용신의 특별전시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서 26일부터조선조 마지막 인물화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ㆍ1850-1941)의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에서 26일부터 8월 26일까지 열린다. 그는 고종의 어진을 비롯해 이하응(李昰應), 최익현(崔益鉉), 황현(黃玹), 최치원(崔致遠), 김영상(金永相), 전우(田憂) 등의 초상을 남겼다. 또 '운낭자 27세상' '황장길 부인상' 등 여인상도 다수 그렸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은 중인 출신의 도화서 화원의 차지였다. 채용신은 이런 관례를 깨고 양반 초상화는 물론 비양반 여인의 인물화도 제작해 눈길을 모은다. 채용신은 1850년 서울 삼청동에서 무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돌산진 수군첨절제사를 지낸 채권영(蔡權永)이다. 채용신 역시 1886년 무과에 급제해칠곡도호부사, 정주군수 등 20년 넘게 관직에 종사했다. 이런 그가 언제 누구에게서 초상화를 배웠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명암법, 음영법 등 서구의 표현기법을 도입해 근대적 미의식을 창출하고 그 저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극세필을 이용해 얼굴의 세부 묘사에 주력하는 이른바 '채석지 필법'은 그가 독특한 화풍으로 인물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무과에 급제했지만 화가로서 활약이 더 컸다. 1900년에 화원 조석진(趙錫晋) 등과 함께 태조 어진모사(御眞模寫)의 주관화사(主管畵寫)로 참여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고종 어진도사(御眞圖寫)와 중추원 의관에 제주되는 등 타고난 재능을 맘껏 발휘했다. 정주군수로 보임되던 1904년부터는 최익현 등 애국지사와 항일의병의 초상을 주로 그렸다는 점이 눈에 띈다. 국가의 주권을 사실상 포기한 을사보호조약은 채용신의 관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2품으로 승차했으나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사임하고 향리인 전북전주로 낙향했다. 그리고 익산, 변산, 고부, 나주, 남원 등지를 돌며 우국지사와 유학자의 초상을 본격적으로 그렸다. 이는 독립운동의 전개와 기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연유로 미술계 일각은 채용신을 금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김은호(金殷鎬)보다 높이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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