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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ㆍ봄이 왔는데 봄같지 않다)'
요즘 경상남도 통영시에 몰려 있는 중소 조선사들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지난 13일 통영시에 위치한 중소 조선사인 21세기조선 작업장에서는 3만4,000톤급 벌크선 1013호와 1016호의 건조작업이 한창이었다. 현재 1013호는 89%, 1016호는 50%의 공정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 직원들의 표정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이들 2척의 선박이 오는 9월께 그리스 선주사 측에 인도되면 일감이 떨어져 조선소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21세기조선의 한 관계자는 "현재 본사 인력 120여명과 협력사 직원 40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9월 전에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30명 정도만 남아서 마무리 작업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이후에는 별다른 계획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장 직원들 역시 독이 텅 비게 되는 9월 이후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한 직원은 "수주난이 장기화되다 보니 의욕이 떨어지고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며 "회사를 살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답답하기만 하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1998년 소형 블록 제조 및 선박 수리 회사로 출범해 2003년부터 본격적인 신조사업에 뛰어든 21세기조선은 한때 잘나가는 중소 조선사였다. 2006년 1억달러 수출탑, 2007년 2억달러 수출탑, 2008년 3억달러 수출탑을 받는 등 성장세를 이어갔고 2008년에는 5,2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정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선박 수주가 끊겼고 키코 파생상품 손실까지 겹치며 경영난이 가중, 2008년부터 채권단의 관리를 받고 있다.
통영과 울산ㆍ부산 등에 위치한 다른 중소 조선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아SB(옛 SLS조선)는 2008년 이후 단 1척의 선박도 수주하지 못했고 SPP조선은 경영난으로 SPP강관을 매각한 데 이어 최근 알짜 계열사인 SPP율촌에너지도 매물로 내놓았다. 삼호조선과 세광중공업은 올 들어 파산 절차에 들어가 중소 조선사의 도미노 파산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이들 중소 조선사의 몰락은 세계 해운경기 침체로 주력 선종인 5만톤급 이하 벌크선과 탱크선 등의 발주가 급감한데다 중국 조선소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 조선사들은 대부분 조선업이 호황이던 2000년대 중반 선박 블록업체와 선박 수리업체들이 신조사업에 뛰어들며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진입장벽이 낮은 벌크선과 탱크선 건조에만 집중하며 사업다각화에 실패한데다 기술개발도 소홀히 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 발주가 크게 줄며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국내 중소 조선사들은 기술력이 비슷한데다 인건비가 훨씬 저렴한 중국 조선사들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대형 조선사들은 2000년대 중반 집중적인 기술개발로 해양플랜트ㆍ드릴십ㆍ액화천연가스(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해 상선시장 불황을 극복하고 있다.
설령 드물게 중소 조선사에 선박 수주 기회가 찾아와도 금융권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아 물거품이 되기 일쑤다. 중소 조선업계 관계자는 "통영 지역의 한 중소 조선사가 선박 수주를 위해 금융권에 선수금환급보증(RG) 발급을 요청했지만 금융권이 저가 수주에 따른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발급을 거절했다"며 "중소 조선사는 수주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처럼 중소 조선사의 상황은 암울하지만 정부 차원의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지식경제부 자동차조선과의 한 관계자는 "중소 조선사의 위기는 해운 불황에 따른 시장의 문제인데다 채권은행들의 구조개선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별도의 대책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 조선사의 연쇄 붕괴는 지역경제 및 고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업계와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무엇보다 기술개발을 통해 중소 조선사의 사업영역을 특화시키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성우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중소 조선사가 어려움을 겪는 것은 기술력이 부족해 중국 조선사와의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라며 "중소 조선사의 선종을 군함 등 국방 분야나 대형 어선 등으로 특화시켜 기술력을 키우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와 대형 조선사들이 중소 조선사의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경영난에 허덕이는 중소 조선사들을 통폐합해 규모를 키우고 경쟁력 있는 선종으로 특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기술력이 앞선 대형 조선사들이 중소 조선사의 기술개발을 돕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