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30일] 버지니아 의회


1619년 7월30일, 아메리카 동부 제임스 타운(James Town). 24명의 성인 남자가 회의를 갖기 위해 교회당에 모였다. 식민지에 인력을 송출한 버지니아 회사의 대표자와 성직자ㆍ거주민들이 참석한 회합의 명칭은 ‘버지니아 버지스 의회(Virginia House of Burgesses)’. 버지스란 세금을 낼 수 있는 자유농민. 유산자 계급을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주아와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다. 축소판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격인 버지니아 의회는 미 대륙 최초의 민주주의 기구였다. 모국인 영국에서 절대왕권의 권력이 한창일 때 식민지에서 제한적이나마 의회 성격의 기구가 세워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정치적 당근 차원이었다. 식민지 이주를 기피하고 그나마 남은 정착민들도 본국 귀환을 원하는 상황에서 제한적 자치권과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두번째는 경제적 이해관계 조정. 북미 식민지 최초의 경제호황을 가져온 작물인 담배 경작을 둘러싼 이주민 간의 갈등이 잦아지자 조정을 위한 기구가 필요했다. 버지니아 의회의 첫 안건도 본국 수출용 담배의 최저 가격 설정이었다. 여자 문제도 숨겨진 의제였다. 1619년 봄 여성 90명을 태운 배가 도착한 후 잎담배 60㎏에 해당하는 재산이 없어 아내를 사들이지 못한 남성들의 불만 해소와 사회적 성비 안정이 의회의 과제였다. 영국 왕실은 버지니아 의회의 민주주의가 본국에 파급될까 우려해 일시적으로 기능 정지 등의 명령을 내렸지만 버지니아 의회는 확대 발전하면서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제 역할을 다해냈다. 버지니아 의회의 성립은 미국인들이 공식적인 선조로 여기고 있는 메이플라워호 청교도의 도착보다 1년여를 앞선다. 출발점에서부터 돈과 권력ㆍ이성 문제가 미국 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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