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4월11일] 석유전쟁

1942년 4월11일 일본이 들썩였다. 보르네오산 원유를 실은 첫 유조선이 요코하마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뽑아 쓰는 원유’는 일본의 오랜 숙원이었다. 태평양전쟁 직전 일본의 에너지원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8%. 의존도는 얼마 안됐지만 일본은 석유 때문에 전쟁에 나섰다. 중국 침략, 독일과의 동맹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ㆍ네덜란드가 대일 석유수출을 차츰 중단하자 당시 세계 3대 원유산지이던 동인도제도의 유전지대를 노리고 나선 것. 진주만 공습도 배후의 미국 함대를 먼저 치자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석유를 위한 전쟁에서 점령지의 원유가 들어왔으니 기쁠 수밖에.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떠나면서 파괴한 유정복구에 매달렸지만 생산량은 예전의 40%에 그쳤다. 운송도 쉽지 않았다. 독일군 잠수함 U-보트의 활약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군 잠수함들은 일본으로 향하는 유조선을 철저하게 때려 부수었다. 일본이 보유한 철제 선박의 86%가 미 잠수함의 밥으로 사라졌을 정도. 1944년부터는 남방점령지로부터의 석유반입이 거의 끊겼다. 인공기름을 만들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진을 빼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유조선이 없어 300~500배럴이 들어가는 고무자루에 원유를 담아 예인선으로 끌고 가는 고육책까지 동원했지만 석유 부족은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다. 자원 부족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 꼴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자원전쟁은 먼 얘기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자원확보전이 뜨겁다. 무기가 총에서 웃음과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석유수입 세계 4위인 한국은 석유가 없으면 전체 산업이 마비되는 구조인데도 절약운동은 물론 이렇다 할 자원확보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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