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품위(品位)를 생각한다. 왜 새해의 화두가 품위여야 하는가. 그것은 품위의 회복이 없이는 한국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이다.
품위는 금화(金貨)안에 들어있는 금의 비율처럼 물질의 질적인 순도(純度)다. 물질의 세계에서는 순도가 높을수록 고품위가 되듯이 정신세계에서의 품위 역시 순도로 결정된다. 거기에 겸손과 교양이 곁들여지면 인격적 품위는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품위의 적(敵)은 편협과 교만과 무지다.
편협과 교만에서 벗어나야
한국은 지난 40여년 동안의 압축성장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만나 애써 쌓아올린 성장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런 실패를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국제사회는 우리가 이룩한 업적을 아직도 `기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 그런 평가에 자부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두개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만 달러 함정`과 `비수렴 함정(Non-Convergence Trap)`이 그것이다.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저력을 갖고 있음에도 선진국 문턱을 넘지 못하고 턱밑에서 허우적대는 한국의 자화상이 두개의 함정 안에 있다. 작은 성취이후의 정신적 해이로 인해 국민소득이 지난 10년 가까이 1만달러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이 `1만달러 함정`이라면, 선진국 못지않게 자본과 노동을 투입하면서도 장기적 정체를 면치 못하는 것은 기술력과 투자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비수렴 함정`의 요지다.
현 정부가 `동북아중심국가`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국정의 목표로 정한 것도 함정탈출을 위한 캐치프레이즈다. 그러나 그것은 구호로 달성될 목표가 아니라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선진국이 못되거나 오히려 후진국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예측치고는 불길하지만 실제 그렇게 된 나라가 한둘이 아니라는 데 경계의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앞에서도 정치는 정쟁과 비리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고, 경제는 가계와 기업의 신용불량사태로 간단없이 외환위기의 악몽이 넘실대고 있다. 이래서야 선진국이 되겠느냐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
함정탈출의 열쇠는 바로 정치와 경제가 품위를 갖추는데 있다. 그러지 못하면 한국의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하다. 비록 정치와 경제가 고품위는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만신창이가 된 적도 일찍이 없었다. 진행중인 정치자금비리 사건에서 정치와 경제는 `악의 축`처럼 되었다.
먼저 정치의 품위를 살리는 길은 깨끗한 선거를 치르는 것이다. 선거자금 수사의 와중에서 올해 우리는 17대 총선을 치른다. 정치자금 비리사건의 교훈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첫 시금석이다. 이 선거를 깨끗하게 치르는 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첫 관문이다. 총선이 또다시 돈 선거로 얼룩진다면 우리에겐 희망은 없다.
정치의 품위는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토양은 유권자들이 만든 것이다. 정치인에게 돈을 요구하는 유권자는 주는 정치인 못지않게 나쁘다. 올해 총선은 정(政)ㆍ경(經)ㆍ민(民) 사이의 돈 선거 삼각고리를 확실하게 끊는 계기가 돼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권력의 기반이나 집권의 과정에서 이전 정부들과는 판이했다. 사회적 병리에 대한 참신한 처방도 기대됐다. 그러나 지난 한해동안 현 정부가 내놓은 것은 `소음` 뿐이었다. 대통령의 품위없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온갖 정쟁의 발단이 됐으며, 나라의 품위마저 떨어뜨렸다. 그것은 동북아중심국과 소득2만달러달성을 선도해야 할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일은 결코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
경제의 품위를 살리는 길은 제도와 제품 양면에서 이뤄져야 한다. 제도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제품의 품위는 기술과 서비스의 개발에 달렸다. 기술이 고품위 제품의 필요조건이라면, 사람의 정성은 충분조건이다. 제품에 정성이 들어가야 고품위는 완성된다. 정성은 생산에서 유통 판매 그리고 애프터서비스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발양돼야 한다.
정경유착 끊어야 선진국
우리나라는 핵심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기술은 세계최고기술의 65%수준에 불과하고, 시간적 기술격차는 5.8년이라는 분석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은 앞으로 5년 이후면 경쟁국들에게 추월 당할 위기에 놓여 있다. 기술이 떨어지는데 정성마저 모자란다면 한국상품이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기는 어렵다.
서울경제는 올해의 캐치프레이즈를 `힘 모아 다시 뛰자`로 정했다. 우리에겐 더 이상의 우왕좌왕할 여유가 없다. 시행착오는 지난 1년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힘 모아 다시 뛰어 도달할 목표가 `품위의 한국` 임은 자명하다.
<이재용기자 jy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