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추경론 고개… 정부 편성 시기 딜레마
연초부터 추가경정예산 편성론이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 주요국이 최근 줄줄이 신용강등을 당한데다 이란 사태 여파로 오일 쇼크 우려까지 제기되는 탓이다. 우리 정부도 최악의 경우 추경 외에는 대안이 없지만 선제적으로 이를 실행할 수 없어 '뒷북'을 칠 수 있다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지난 2009년 3월 말 정부는 28조9,000억원의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금액도 이례적으로 컸지만 자존심을 접고 1ㆍ4분기에 전격적으로 추경을 제출한 정부의 결단도 과감한 것이었다. 우리 경제는 당시 선제적 조치에 힘입어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하지만 올해에는 2009년과 같은 1ㆍ4분기 추경 편성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반응이다.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유럽발 재정위기의 향방은 스페인 등의 국채만기도래가 몰리는 오는 2~4월 동향을 봐야 가늠할 수 있는 만큼 조기 추경론을 꺼내는 것은 성급하다"고 말했다.
1ㆍ4분기가 어렵다면 2ㆍ4분기 추경 편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6일 노무라증권은 우리 정부가 2ㆍ4분기에 12조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2ㆍ4분기에는 4월 국회의원 총선거로 정국이 요동치는 시점이어서 국회의 추경 심사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국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하반기 추경 역시 사정이 녹록지 않다. 국회가 매번 총선 직후 첫 개회를 하기까지 장기간 진통을 겪었던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하반기 일찍 추경을 편성해도 추석 무렵까지 국회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18대 국회 총선이 열렸던 2008년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정부는 고유가 상황에 대비하겠다며 6월20일 국회에 추경안을 제안했지만 9월18일에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여야가 교섭단체 구성과 같은 원 구성 문제를 놓고 석달가량이나 다퉈 9월1일에서야 18대 국회가 문을 연 것이다.
이 같은 늦깎이 추경으로는 경기진작 효과를 제대로 내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추석 후에는 연말까지 시간이 두 달여밖에 남지 않아 추경으로 승인된 상당수 금액이 미집행될 수 있는 탓이다. 한국채권연구원은 '재정의 경기 조절 기능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추경 제출시기는 대체로 9월 말에서 10월 초로 매년 비슷한 경향을 갖는 특징이 있다"며 "이러한 추경의 하반기 편성은 예산집행상 이월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애초에 조기 추경 편성이 어렵다면 무리하게 뒷북식 재정정책에 집중하기보다는 비(非)재정정책으로 탄력적 대응을 하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금리를 내리거나 지준율을 완화하는 등 통화정책을 신축적으로 펴는 것이다. 금리를 인하하면 상대적으로 고금리를 좇는 해외 자본의 국내 유입을 둔화시켜 과도한 원화 절상을 막고 이는 우리 수출상품의 가격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통화정책에도 제약은 있다.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는 "통화정책을 펴려고 해도 가뜩이나 커진 가계부채를 더욱 늘릴 위험이 있어 운신의 폭이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경우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이나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의 장치를 보다 엄격히 운용해 가계대출 증가는 억제하면서 대신 기업대출 관련 보증완화 등을 확대해 통화정책의 부작용을 줄이면 경기의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
만약 비재정적 수단으로도 힘에 부쳐 늦깎이 추경이라도 부득불 해야 한다면 규모는 올해 내 모두 집행될 수 있는 '미니추경' 수준으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태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하반기에 추경을 편성할 경우 자칫 돈을 다 쓰지 못할 수 있다"며 "따라서 추경 규모는 올해 내에 쓸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화하되 경기악화에 대응할 수 있는 내용으로 내실 있게 짜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경우 추경 용도는 단순 복지지출보다는 일자리 창출 기여도가 높고 경제성장을 동반할 수 있는 사업에 집중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국회예산정책처 관계자는 "경제성장이 동반되지 않아 가계의 절대소득 수준이 떨어지면 정부가 복지 분야 재정을 확대해 국민기초생활급여나 저소득층 지급수당을 올린다고 해도 가구 간 이전소득이 떨어져 효과가 반감된다"고 지적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재정 확대의 거시적ㆍ경제적 효과 분석' 보고서에서 국내총생산(GDP)을 높이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산업ㆍ중소기업 및 국토ㆍ지역개발, 수송ㆍ교통, 산업ㆍ중소기업 분야의 재정지출을 높이는 것이 복지지출 증가보다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