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동십자가가] '이분법'의 틀을 깨라

몇년전 한일 양국에서 있었던 서울대와 동경대를 폐지하라는 목소리도 이같은 우려를 담은 것이었다. 그나마 동경대의 경우, 총장이 나서서 "지금 일본의 각계각층을 이끌어가는 동경대 출신들이 잘못해서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었다"면서 사과를 했지만.어쨌든 이런 가운데 국내 어지간한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할 한 과학고의 열등생(?)이 세계 최고 명문대학에 그것도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나라 교육현실의 뒤통수를 때리는 코미디같은 얘기다. "미국에서 태어나 12세까지 살았으니 영어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되물음은 그야말로 우문이다. 그 학생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대학교수고 미국생활의 경험등 환경이 뒤를 받쳐준 까닭이다. 그런 행운을 갖지못하는 또다른 열등생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분법의 굳건한 쇠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선, 공산주의=악. 재벌=악, 중소기업=선 등등-. 강봉균 장관이 지적한 재벌에 대한 우리 국민의 다층적 의식구조는 모순투성이 인간의 예를 적시한 예에 불과하다. 아무튼 이분법은 예로부터 인간에게 편리한 사고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 주역의 양과 음, 그리고 성리학의 이와 기. 다양한 현상을 두 요소의 배합으로 풍리하는 이원론은 유용한 설명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이분법적 사고로는 복잡다기한 현대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굳이 "모든 것은 관계속에서 상황에 따라 새롭게 읽혀야 한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사고는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분법의 안정된 긴장이 깨질 경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이분법적 구도를 생각한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헌법을 가졌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붕괴에 뒤이은 히틀러 제3제국의 등장이나 섀무얼 헌팅턴이 제기한 '문명충돌론'도 어쩌면 이의 결과물인지 모를 일이다. 민주주의란 '등가의 원칙'을 세워가는 과정이고, 민주주의 사회란 이같은 인식이 보편화된 사회를 일컫는다. 물론 사회의 여러 분야를 동등한 가치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이 되고 싶다는 개인의 선호와는 별개다. "같은 종의 개체와 그 변종들 사이에 생존경쟁이 가장 심하다"는 다윈의 이론은 인간사회에서는 반드시 옳은 답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문화사의 도도한 흐름이 궁극적으로 '약자와 강자가 공존한즌 사회체제'를 향하고 있음을 안다. 21세기가 코앞에 닥친 지금, 우리는 교육,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다원주의', 다원적 사고에 익숙해져야 한다. 공존의 열쇠는 다양한 관계에서의 상호인정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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