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1월22일] 유신헌법 확정 4공화국 출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와 ‘평화적 통일 지향’, 명분은 그럴듯했다. 유신(維新)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꾸겠다는데 반대란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유신을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한문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한자로 써서 외워야 했고 유신이라는 말의 뜻도 배워야 했다. 지금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친다면 결과는 어떨까.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게 통했다. 1972년 11월22일 이름하여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하루 전날 실시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91.8%. 이날 새벽5시쯤 투표자의 과반수를 넘는 찬성표가 나와 유신헌법은 확정됐다. 개표 결과 찬성률은 91.5%에 달했다. 1972년 10월17일을 기해 단행된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도 취했다. 그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후속조치를 속속 단행, 10월27일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개헌 반대 발언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국민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정상적 방법으로는 재집권하기 어려워진 박정희 정권이 남북대화의 명분을 앞세우며 발표했던 유신헌법이 확정돼 대통령 선출이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바뀌면서 군부독재 시대가 시작됐다. 개헌 당시 유신헌법의 기본적 성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 민주주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질서 확립, 자유와 평화수호의 재확인’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유신헌법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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