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처/「과기혁신 5개년 계획」 수정 불가피/환차손 170억 자체흡수 노력/기업 더 위축… “분담률 조정을”IMF(국제통화기금) 한파가 불어닥치면서 과학기술분야도 찬바람을 맞게 됐다. 이에 과기처·출연연구기관·기업 부설연구소의 분위기와 대책을 짚어 본다.<편집자주>
지난달 27일 과기처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튿날로 예정된 과학기술장관회의에서 의결할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에 대한 보도자료를 미리 발표했다.
이날 과기처의 담당 국장은 요즘 어려운 시기에 희망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니까 기사를 크게 다루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튿날 과학기술장관회의를 주재할 림창렬부총리가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급히 일본으로 출국하는 바람에 회의가 무산됐다.
오는 2002년까지 정부 연구개발 투자를 정부 예산의 5% 이상으로 늘리고 94개 중점 과제에 대해 8조원을 투자한다는 야심찬 장미빛 계획을 발표하려던 과기처는 「닭 쫓던 개」 꼴이 됐다.
최근 갑자기 불어닥친 IMF 한파에 과기처는 별로 움츠리지 않고 아직 의연한 것처럼 보인다. 지난 4월 제정된 「과학기술혁신을 위한 특별법」이 건재한 이상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또 IMF 한파로 앞으로 정부의 재정 긴축이 예상되지만 국가 산업의 중장기적인 경쟁력을 좌우하는 연구개발 예산마저 긴축의 금고 속에 닫아놓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단지 국가 전체가 긴축 기조로 돌아선 만큼 행정경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환차손으로 발생하는 부담을 자체 흡수하는 수준에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과기처는 4일 출연연구기관장 간담회를 열어 정부의 긴축 기조 아래 과학기술분야의 대응책을 논의하고 각 연구기관별로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마련토록 했다.
전의진 과기처 연구기획조정관은 『과기처도 허리띠 졸라매기에 동참해야 한다』며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도 현실적으로 수정·보완하고 각 사업별로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과기처가 연간 5천억원 정도의 예산을 쓰는데 이 가운데 약 1천억원이 외국으로 나간다고 보면 된다』며 여기서 발생하는 환차손을 해결하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덧붙였다.
과기처에 따르면 산하 출연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이달부터 내년 1·4분기까지 1백70억원 정도의 환차손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다목적 실용위성이나 핵융합 토카막장치처럼 미국으로부터 기술을 이전받는 대형 연구개발사업의 경우 환차손 부담이 매우 심각하여 사업의 축소나 연기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재익 기술협력국장은 『국제협력분야에서 올해 예산을 이미 집행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환차손 부담이 적은 편』이라며 『내년 예산을 집행할 때쯤이면 환차손이 지금보다는 줄어들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또 『과기처의 국제 공동연구사업은 달러가 아닌 원화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환차손이 없지만, ISTC(국제과학기술센터) 등 분담금으로 수행하는 사업은 조정이 불가피할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석식 기술인력국장은 『외국과의 인력교류사업도 타격을 받게 됐다』며 『지원 경비보다 인원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특히 박사후 연수과정 인원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최상삼 박사는 『긴축 기조에서 연구개발 투자는 기초 연구보다 실용화 개발에 비중을 두게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정부보다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으로 우려했다.
이어 『정부와 기업이 공동으로 자금을 부담하는 특정연구개발사업이나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은 과제를 줄이기보다 현재 50:50인 분담율을 조정하여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방향을 실용화 연구로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의 황룡수박사는 『정부의 재정 긴축에 따라 연구개발 투자가 소홀해질 우려가 있다』며 『정부는 성급하게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지 말고 기술경쟁력을 선도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긴축 기조로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데 차질이 생길 것으로 우려되지만 오히려 구조조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획·조정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의 김선근박사는 『환율 인상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국제공동연구 분담금 부담이 30% 늘어나고 해외 현지 연구소 운영비도 30%의 차질을 빚게 됐으며 진행중인 과제도 예산이 30% 삭감당하는 결과를 낳게 돼 환차손을 흡수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학의 연구개발 투자를 지원하는 한국과학재단의 이종현 연구지원과장은 『과제당 단가를 높이고 과제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지원할 방침』이라며 이에 따라 과제 선정율이 지난해 35% 수준에서 28%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허두영 기자>
◎기업연구소/연구원 감원·과제축소 불안감/모그룹 투자 축소… 팀해체까지/선진국과 기술격차 더 커질우려
『내년에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지난달 26일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회장 강신호) 주관으로 각 기업 부설연구소의 연구관리실장들이 모였다.
매년 이때마다 기업 연구소의 연구관리실장 간에 친목을 다지고 정보도 공유하기 위해 열리는 행사지만 이날 참석자들의 안색은 내내 어두웠다.
사상 유례없는 불황의 그늘 속에서 그동안 구조조정의 칼날에 비켜서 있던 기업연구소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추운 겨울」을 맞았기 때문이다.
지난 2일 국내 기업연구소 중 규모가 가장 큰 삼성종합기술원에서는 임관원장과 연구원간의 간담회가 열렸다.
삼성그룹이 최근 조직과 투자를 30% 줄인다고 밝힘에 따라 기술원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연구원 감원과 연구과제 축소에 대한 불안감이 그 배경이었다.
임원장은 이 자리에서 『기존 연구는 계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불황일수록 연구개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원장 뿐아니라 대부분의 대기업 연구소장들은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믿는 연구원은 드물다. 모그룹이 투자를 줄이는데 연구소가 어떻게 줄이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삼성의 한 연구원는 『연구개발비를 줄이지 않더라도 지금처럼 환율이 폭등하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연구비가 크게 줄어드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소 비용은 크게 ▲과제추진비 ▲인건비 ▲장비구입비 ▲관리비로 구성된다. 관리비는 경직성 고정 비용이기 때문에 절감효과가 적다. 그렇다면 감축대상은 인건비, 장비구입비, 과제추진비로 모아진다.
기업 연구소의 한 직원은 『환율 부담이 큰 외국장비 구입을 늦추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또 연구소의 특성상 당장 연구원을 줄이기는 힘들다. 그러나 행정직원중 상당수는 연구소를 떠나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는 또 『바로 이익을 내는 연구나 단기 과제는 큰 지장이 없겠지만 장기 과제는 뒤로 미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연구원도 무풍지대일 수는 없다. 실제로 30대 그룹에 속한 D기업의 연구소는 하반기 들어 인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팀을 해체했다. 연구기간이 오래 긴데다 그룹 경영이 어려워져 투자가 쉽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같은 어려움 때문에 많은 연구소장들이 요즘들어 「자리가 가시방석」이라며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산업기술진흥협의회의 김승재 이사는 『우리가 2∼3년동안 투자를 미룰 때 선진국은 그만큼 더 앞서가기 때문에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면 앞으로 더욱 따라잡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김상연 기자>
◎대학·출연연/“발등의 불”/대책이 없다/“불황기 연구비 안정” 이젠 옛말/고가 외국장비 분야 환차손 심각/장기과제 추진에 애로 겪을듯
한국과학기술원의 A교수는 최근 큰 낭패를 당했다.
정보통신서비스분야에서 최고의 우량기업으로 꼽히던 S사와 꽤 큰 연구과제 계약을 맺기로 하고 도장찍는 일만 남겨놓았는데 S사가 하루아침에 이를 취소한 것이다. 불황에 따라 투자를 줄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A교수뿐만 아니다. 전국 대학의 교수들 대부분이 앞으로 2∼3년동안 기업에서 들어오는 연구비가 대폭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세대의 한 교수는 『기업이 돈 줄이기에 가장 만만한 것이 연구비 아니겠느냐』며 『요즘 교수들끼리 모이면 연구비 때문에 고민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털어 놓았다.
올들어 경제가 불황으로 치달았지만 대학과 정부 출연연구소는 비교적 평화스러웠던게 사실이다.
출연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초만 해도 『지금까지 출연연구소에서 감원당한 사람은 20년동안 손에 꼽을 수 있다』며 『경기불황으로 안정성이 부각되면서 연구원 자리가 선호되고 있다』고 밝힐 정도였다. 대학도 인건비 부담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경제불황을 당장 피부로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발등에도 불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위기감은 4일 과기처 산하 20여개 출연연구소 기관장들이 발표한 「외화절감 대책과 기술역조 타개책」에서도 나타났다.
이날 기관장들은 ▲해외출장을 억제해 1년동안 약 1천만달러를 줄이고 ▲외국 장비와 시설 수입을 억제해 환차손을 줄이며 ▲연간 20억달러에 달하는 해외기술 사용료를 줄이기 위해 원천기술 개발에 주력하기로 했다.
과학재단의 우정표 선임행정원은 『회의에 참석한 기관장들이 이번 불황을 사상 처음 겪는 심각한 사태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연연구소나 대학에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감원보다는 연구비 축소와 환차손 피해다.
출연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정부가 내년 연구개발 예산을 줄이지 않겠느냐』며 『오랜기간 추진하는 장기 과제가 걱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모성 경비를 줄이고 투자의 효율성을 높여 이겨나가겠지만 연구가 다소 늦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대의 한 교수도 『연구비는 물론 박사과정 학생이나 박사후 과정 연구원에게 주는 연구보조비가 줄어들 수도 있다』며 『잘못하면 내년에 30살이 넘는 박사과정 과외선생이 등장할 것』이라며 우려했다.
환차손 문제도 심각하다. 과학기술 연구는 비싼 외국장비를 들여와야 하는게 현실이다. 그러나 환율이 이처럼 폭등하면 같은 연구비를 지원해도 30%가 저절로 삭감되는 셈이다.
과학기술원의 한 교수는 『반도체, 화학공학, 기계공학 등 대규모 장비가 필요한 분야의 연구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이어 『환율이 1달러에 1천3백원 이상으로 오른 지금 교수들은 연구비가 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느끼고 있다』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김상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