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6월 26일] <1733> 여송국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6월 26일] 여송국 권홍우 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여송국 표류인을 송환시키라 명하다(命呂宋國漂人 送還本國).' 조선왕조실록 순조9년(1809년) 6월26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여송국이란 필리핀. 조선에 표류한 필리핀인들이 돌아가기까지는 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항해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1801년 제주도에 표류한 5명의 필리핀들을 두고 조선은 골머리를 앓았다. 대화는 물론 필담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갑해진 조선은 이들을 심양으로 이송했으나 중국도 '알아낼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1807년에는 조선을 찾은 유구(琉球ㆍ오키나와) 사신들이 '여송국 사람 같다'고 추정했으나 분명하지 않았다. 조선이 얼마 뒤 이들의 국적을 확실하게 알아냈다. 전라도 신안군의 상인 문순득(文淳得)이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결국 이들은 중국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상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알았을까. 역시 표류 때문이다. 문순득은 홍어를 사기 위해 거문도로 향하다 폭풍으로 배가 유구까지 떠내려가고 필리핀과 중국을 거치는 3년2개월의 여정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인물. 필리핀에 머물 때도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사를 하며 현지어를 익혔다. 문순득의 표류기는 유배 중이던 정약전이 '표해시말'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이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은 '경세유표'에 나오는 화폐개혁론도 문순득이 경험한 중국과 외국의 화폐제도를 본뜬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최초의 외국 선박에 관한 논문인 '운곡선설' 역시 문순득의 체험에서 나왔다. 200년 전 조선에서 필리핀어를 조금이나마 구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보다는 표류와 절망에 빠진 상태에서도 외국어를 배우고 현지문물을 눈에 담은 문순득의 정신이 놀랍다. 소중한 경험이 나라의 발전에 활용되지 못하고 몇 권의 책자로만 남은 점이 아쉽지만.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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