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억6,400만명. 20세기에 살해된 사람들이다. 전쟁으로 1억5,000만명, 독재권력의 억압으로 1억명, 인종청소로 1,400만명이 죽었다. 대기근으로도 1억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고 휴머니즘이 중시됐다는 20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러고도 지난 100년을 '진보의 세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20세기, 그 속은 더 처참하다. 국가간 계층간 부의 편중과 사회적 불평등은 더 깊어졌다. 세계인구의 20%가 전세계 부의 80%를 차지한다. 세계인구의 5%에 불과한 미국은 자원의 30% 이상을 소비한다. 잘사는 나라 안에서도 불평등은 마찬가지다. 빈부격차는 대물림되고 있다. 전문직 부모를 둔 자녀의 40%가 전문직에 진출하지만 육체노동자 자녀가 전문직을 지닌 경우는 7%에 불과하다. 193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은 남자의 수입만으로 살 수 있었으나 세기말에는 여성의 지위향상, 사회진출 확대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맞벌이에 나서야만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진보의 실상이 이렇다. 진보의 과실을 독점한 극소수 국가와 계층은 기득권 유지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변방에서 경제중심으로 발전한 일본이나 중간정도의 경제규모를 이룩한 한국과 아시아 국가 일부를 제외하면 20세기 내내 서구 우위의 경제판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은 진보 속에서 독점구조가 확대재생산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진보가 어떻게 불평등과 학살, 전쟁 같은 야만성을 낳았을까. 사회적 다윈주의와 인간에게 잠재된 그릇된 욕망이 합쳐진 탓이다. 클라이브 폰팅 영국 스완시 대학 교수는 신간 '진보와 야만'을 통해 적자생존 논리가 낳은 야만을 파헤친다. 우수한 종이 살아 남는다는 진화의 논리, 인간 문명 발달을 확신했던 한 인물의 연설을 들어보자. '강하고 능력 있는 자는 승리하는 반면 약한 존재는 패배한다. 투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 사람이 자기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성의 원리가 아니라 오직 가장 야만적인 투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다.' 연설의 주인공은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는 예외적인 인간이라고? 그렇지 않다. 세상은 히틀러의 생각대로 돌아간다. 20세기의 생산성 향상ㆍ노동의 유연화ㆍ구조조정ㆍ비정규직 확산은 히틀러의 적자생존 논리와 맥락을 공유한다. 인류의 미래가 나아질 것이라는 사회적 다윈주의가 약한 자를 더욱 약하게 만들고 국가간 계층간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진보와 야만'에 실린 내용은 방대하다.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한 '녹색혁명사'의 저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폰팅 교수는 20세기에 일어난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의 거의 모든 사건과 현상을 담아냈다. 사료로서도 가치가 충분할 정도다. 중요한 것은 미래다. 21세기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폰팅 교수의 전망은 음울하다. 보수주의(뭇솔리니 처럼 대부분 자유와 진보로 포장한다)가 확산되고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종족간 혐오가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와 환경문제까지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비관적이다. 압도적 다수는 여전히 야만에 신음한다는 전망이다. 한국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선진국들이 겪었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712쪽, 3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