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인간인 호모사피엔스, 손을 사용하는 인간인 호모하빌리스, 걷는 인간의 호모에렉투스 외에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9145)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루덴스'를 제안했다. 인간의 속성 중 유희본능을 강조해 인류 문화 속에서 놀이가 수행하는 역할을 다룬 하위징아의 저서 '호모루덴스'는 20세기 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를 조명하면서 15세기 리얼리즘을 중세의 끝자락으로 본 '중세의 가을' 역시 하위징아의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하위징아는 네덜란드 화가 반 에이크 형제와 그들을 계승한 플랑드르 화파가 보여주는 극적인 리얼리즘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중세의 풍요가 가꾼 곡식을 수확하는 '가을'에 빗대 중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같은 저서들로 20세기 최고의 문화사가로 꼽히게 된 하위징아의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평전이 출간됐다. 저자는 하위징아가 생전에 몸담았던 네덜란드 레이던대학의 교수로, 베일에 싸인 하위징아의 인생과 저작의 배경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방대한 사료와 눈문, 하위징아가 남긴 기록 등을 연구했고 이를 토대로 그의 철학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다.
독특한 점은 하위징아의 책을 "역사서로 읽히기보다는 일련의 우화로 더 잘 읽힌다"고 분석해 그를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는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유일한 네덜란드 작가"라고 봤다는 것. 하위징아가 '중세의 가을'을 쓸 때는 역사가였고 '에라스뮈스'를 집필할 때는 전기작가였지만 '내일의 그림자 속에서'를 탈고했을 때는 문명비평가였으며 '호모루덴스'에서는 인류학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얘기다.
하위징아는 '대조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기를 즐겼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형성한 대립 구도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각각 이성 대 감성, 절제 대 해소, 종교 대 계몽으로 대조되는 것을 보면서 하위징아의 머릿속에 '대조의 틀'이 자리잡았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일찍 상처한 할아버지가 아내를 이상화 한 채 경건한 생활을 고집한 것과 아내와의 사별을 학문 연구로 승화시킨 아버지 사이에서, 하위징아가 '성스러움과 부재(不在)'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는 접근도 눈에 띈다.
또한 하위징아가 언어학을 모든 인문학 분야의 뿌리라고 봤다는 점을 입증해내는 등 그의 저작을 세밀하게 들여다봤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