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기침체와 유럽 재정위기가 장기화되면서 한국경제가 '부동(不動) 모드'에 들어갔다. 가계는 소비를 줄이며 지갑을 닫았고 기업은 신규투자를 중단하거나 보류했다. 정부는 오는 2013년 조기 균형재정을 맞추기 위해 재정 확대정책 동원을 망설이고 있다. 가계ㆍ기업ㆍ정부 등 경제주체들이 불확실한 해외변수에 몸을 사리며 관망 태세를 보이고 있는 것.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금리완화 조치가 필요하지만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물가 때문에 기준금리도 5개월째 동결됐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재정을 풀어 양적 완화 조치를 취하고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들은 금리인하에 나서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에 손발이 묶인 상태다. 가계와 기업 부문에서도 활력이 사라지고 있다. ◇가계는 지갑을 닫고=유럽발 재정위기라는 불확실성으로 가계소비는 잔뜩 움츠러든 상태다. 내구재 등 경기민감품목에는 좀처럼 지갑을 열지 못하는 반면 교육ㆍ의료비 등 필수지출에 대한 부담은 늘어 가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가계심리지수(CSI)의 세부항목인 소비자지출전망을 보면 내구재와 외식비 지출전망 CSI는 올해 내내 90 안팎에서 맴돌고 있다. CSI는 100 이하면 지출을 줄이겠다고 답한 소비자가 늘리겠다는 사람보다 많다는 뜻이다. 경기 불확실성에 승용차ㆍTVㆍ냉장고 등 고가의 가전제품 구매와 외식비 지출을 줄이겠다는 사람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얘기다. 반면 교육비와 의료ㆍ보건비 지출전망 CSI는 100을 웃돌고 있다. 특히 건강과 직결되는 의료ㆍ보건비 CSI는 올해 들어 12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소비자들이 벌어들인 돈을 삶의 질 향상보다는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지출 부문에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투자를 중단하고=기업들이 몸을 바짝 사리고 있다. 올해 초 시설투자와 연구개발(R&D)에 공격적으로 나서겠다고 선언했던 기업들이 유로존 재정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으며 투자를 대거 중단하거나 보류하고 있다. 지난 1월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21.2%에 달했으나 유로존 위기가 부각된 7월에는 -0.3%를 기록한 데 이어 9월에는 -4.2%로 뚝 떨어졌다. 미국 경기침체와 유럽 재정위기라는 이중장벽에 가로막히며 기업환경이 180도 바뀐 것. 우선 시설투자에 필요한 자본재를 수입하는 규모가 크게 줄고 있다. 기업들의 자본재 수입은 5~7월 월평균 127억달러를 나타냈고 8월에는 134억 달러까지 증가했지만 그리스 재정위기가 증폭된 9월에는 119억달러까지 떨어졌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자본재 수입이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업들이 설비투자를 줄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실제 포스코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고 올해 투자를 1조원 이상 줄이겠다고 밝혔고 LG디스플레이ㆍLG화학ㆍSTX 등 대기업이 잇따라 신규투자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방향으로 투자전략을 선회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사정이 더욱 암울하다. ◇정부는 재정지출 망설이고=옴짝달싹 못하기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320조원 이상의 예산을 주무르는 기획재정부는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2008년의 미국발(發) 금융위기 때처럼 경기가 급속도로 하강하면 추가경정예산이라도 편성해 확장적 정책을 펼 텐데 지금은 모호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전세계가 위기에 처한 것은 맞는데 그 진행이 빠르지 않다 보니 예산을 풀고 금리를 낮춰 경기를 살리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경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유럽 재정위기로 금융 부문의 리스크는 커졌지만 아직까지 실물 부문의 충격은 명확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의 복지재정 확충 요구와 재정건전성 확보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점도 정부의 운신 폭을 좁히는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