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앞으로 시장만능의 금융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글로벌 유동성 잔치는 끝났다. 시장은 금융위기를 스스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했고 위기 구원은 이제 각국 정부의 몫이 됐다. 미국 재무부는 7,000억달러의 부실자산을 인수하기 위해 구제금융 투입을 준비 중이며 유럽은 유동성 위기에 처한 시중은행을 잇따라 국영화하고 있다. 당장 미 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 하원 감독행정개혁위원회는 6일(현지시간) 파산보호를 신청한 리먼브러더스의 리처드 풀드 전 회장을 출석시킨 가운데 청문회를 열고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이달 말까지 이어지는 청문회에는 저금리정책으로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는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과 투자은행과 헤지펀드 경영진이 줄줄이 출석할 예정이다. 미국의 이번 구제금융법 발효로 미 재무부는 의회로부터 2년간 월가를 통제할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넘겨받았다. 부실자산 매입 과정에서 주식인수권을 확보할 수 있어 여차하면 경영진 교체는 물론 회사를 ‘준 국영화’할 수 있다.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시스템 위기에 대비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재무부는 지난 3월 금융기관 감독 및 규제 강화를 골자로 한 ‘금융개혁 청사진’을 마련해놓은 상태다. 이 청사진은 내년 1월 출범할 새 정부 금융정책의 핵심 골격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나 민주당이 집권할 경우 ‘폴슨 청사진’은 보다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이달 3일 구제법안 표결 후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우리 업무의 시작일 뿐”이라며 앞으로 적절한 입법조치가 뒤따를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여러 곳으로 분산된 금융감독시스템은 전면적인 수술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레버리지(차입투자)로 위기를 확산시킨 투자은행과 파생상품은 각각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맡고 있으나 이번 금융위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재무부의 금융개혁 청사진은 금융감독을 FRB로 일원화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파생상품은 규제의 칼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초 1조달러에 불과했던 파생상품시장은 지난해 60조달러로 급팽창하면서 위험을 헤지하려는 당초 설계 취지와는 달리 위험전파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AIG는 4,000억달러어치의 크레디트디폴트스와프(CDS)에 투자해 대규모 손실을 입고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연명했다. 선물시장 감독권을 가진 하원 농업위원회는 이달 중 ‘CDS 청문회’를 개최, 무한팽창의 파생상품 거래에 제동을 걸겠다는 방침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이후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자유방임주의가 한 세기 만의 위기 앞에 무용지물로 판가름 났고 케인스식 시장개입주의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부활한 모습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신 황금광 시대의 종언”이라면서 “월가의 부와 명예, 권력이 붕괴됐다”고 진단했다. 월가의 몰락과 정부의 개입을 두고 벌써부터 지난 30년간을 풍미했던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그러나 월가의 붕괴와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신자유주의의 종언 또는 월가의 종말이라고 보는 시각은 성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차기 정부가 감독체제를 정비하겠지만 미 자본주의의 대표주자인 금융산업에 치명타를 입힐 정도로 규제장치를 마련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제조업이 망가졌기에 이 같은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차기 정부가 누구든 월가 경쟁력을 훼손할 정도로 규제의 칼을 들이대지는 않을 것”이라며 “투자은행은 몰락했지만 투자은행 기능과 인적자원ㆍ네트워크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