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4일] 이리운하

1817년 7월4일 뉴욕. 이리 운하(Erie Canal) 착공식이 열렸다. 필요성이 거론된 지 118년, 타당성 조사 이후 26년 만이다. 독립기념일 행사에 가려졌지만 운하 건설은 역사의 흐름을 갈랐다. 물줄기뿐 아니라 경제와 지역구도, 남북전쟁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뉴욕에서 이리호까지 깊이 1.2m, 폭 12m, 총길이 584㎞의 뱃길이 완공된 것은 1825년 10월. 30년은 걸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달리 공사가 8년여 만에 끝난 비결은 신규 이민으로 노동력이 넘친데다 나무뿌리 뽑는 장치 등 신기술이 동원된 덕분이다. 운하는 물류비를 10분의1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육상에서 말 50필이 필요한 화물을 운하에서는 1~2필의 말이 양안에 마련된 소로를 오가며 끌었다. 서부 개척민이 늘고 시카고와 디트로이트 등이 공업도시로 성장한 것도 운하 덕분이다. 가장 큰 수혜자는 뉴욕. 짭짤한 운임수입을 누리며 공사비 700만달러(요즘 가치 35억달러)를 7년 만에 회수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항구도시로도 떠올랐다. 운하 건설에 대거 유입된 독일인 석공들은 훗날 맨해튼의 고층 건물을 올렸다. 지역간 희비도 엇갈렸다. 서부개척의 경유지로 남부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 남부 출신 인구가 76%에 달했던 일리노이를 비롯, 미시간ㆍ오하이오 등의 개척민은 북부를 거친 이민으로 채워졌다. 이리 운하가 없었다면 북부편에 섰던 중서부 지역이 남부동맹의 영향권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하 하나가 경제권 단일화와 공업화를 이루고 분단까지 막은 셈이다. 남부는 상대적으로 소외됐지만. 철도와 도로에 밀려나는 와중에서도 30톤짜리 배가 다니던 이리 운하는 1,000톤급 선박이 왕래할 만큼 커졌다. 5대호 주변의 운하는 여전히 미국 경제의 젖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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