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씨는 올 초 열린 대하 소설 '아리랑' 100쇄 기념 기자 간담회에서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의 소설을 읽을 준비가 돼 있는 독자 40~50만명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리랑을 쓴다고 했을 때 길고 딱딱한 주제의 대하 소설이 요즘 같은 시대에 얼마나 읽히겠느냐는 세간의 걱정이 많았는데 정작 조정래씨는 그다지 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정래씨가 말한 '언제라도 진지한 글을 읽을 준비가 된 사람'. 바로 김훈의 남한산성 독자층들과 대략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남한산성은 출간 1달 보름여 만에 10만부가 팔려나가며 '한국 문학의 벼락 같은 축복'이라는 말까지 낳았다. '항상 대기하고 있는 독자'라는 조정래씨의 말을 새겨보면 남한산성의 위세는 결코 벼락 같은 축복이 아니다. 겨울 지나 자연의 섭리 따라 내리는 봄비처럼 예정된 축복에 가깝다. 가벼운 일본 소설의 홍수와 실용서의 범람 속에서도 독자들은 진지한 읽을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베스트셀러 소설을 보면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책들이 많다. 2,500년 유교 역사를 다룬 최인호의 '유림'은 완간 넉달만에 80만부를 찍었다고 하고 삼국시대를 다룬 김정한의 '삼한지'는 출간 4년여만에 30만부가 팔리며 스테디셀러 자리를 꿰찼다. 이 둘 모두 단편이 아니라 각각 6권, 10권의 대하소설이라는 점은 놀랍기만 하다. 진지하게 쓰면 안 팔린다는 요즘 서점가의 통념은 그저 '통밥'에 지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인조 임금의 '삼전도 굴욕'을 소재로 한 소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의 청나라 군대에 포위돼 남한산성에 46일을 갇혀야 했던 임금과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렸다. 맞서 끝까지 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 등 주전파와 '죽음으로써 삶은 지탱하지는 못한다'며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등 주화파의 대립과 갈등이 펼쳐진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난세(亂世)의 백성들을 바라보는 작가 김훈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이다. 소설 속에 담긴 "기름진 뱀과 같은 문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유려한 문체가 다소 단조로운 극적 구성의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