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대리인이 횡령한 돈에 세금 물려선 안돼"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에

대법, 양도세 부과 취소 판결

부동산 사기에도 영향 끼칠듯

자신의 재산 처분을 맡긴 대리인이 횡령한 돈에 대해 사기를 당한 당사자에 소득세를 물려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 판결로 부하 직원에게 속아 주식 매각대금을 떼였던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수억원의 양도소득세 납부 부담을 벗게 됐다.

이번 판결은 '직원에게 자기 재산 처분을 맡겼다가 사기 피해를 본 경영자'뿐 아니라 '부동산업자에게 집 처분을 부탁했다가 사기를 당한 서민' 등의 사례에도 적용될 수 있어 파장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정 회장이 "양도소득세와 증권거래세 7억9,000만여원을 취소해달라"며 남양주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양도소득세 7억7,000만원은 취소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고 29일 밝혔다. "소득세와 거래세 과세 모두 적법했다"고 한 2심 결과를 뒤집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정 회장은 지난 1999년 현대산업개발 재정팀장으로 근무하던 서모씨에게 자신이 소유한 신세기통신 주식 약 52만주를 팔라고 지시했다. 매도가격·상대방·시점 등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모두 서씨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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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씨는 정 회장의 신뢰를 악용해 그해 12월 52만주를 173억원에 팔면서 140억5,000만원에 매도한 것처럼 속였다. 세금 신고도 140억5,000만원을 기준으로 했다. 서씨는 이후 2002년 회사를 퇴사한 뒤 횡령한 32억5,000만원이 포함된 자산을 갖고 미국으로 이주해버렸다.

세무당국은 서씨의 횡령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나자 2006년 실제 거래대금인 173억원을 기준으로 과세해야 한다며 정 회장에게 차액인 30억여원에 대한 양도소득세 7억7,000만원과 증권거래세 1,780만원을 내라고 통보했다. 정 회장은 부하 직원이 횡령한 돈에 대한 세금을 자신에게 물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원고 승소로 판결했지만 2심은 모든 과세가 적법했다고 판단했다. 대리인이 한 행위에 대해서는 업무를 맡긴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민법상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다. 또 정 회장이 서씨에게 32억여원을 떼인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는 둘 사이에 정산해야 할 문제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대리인이 위임의 취지에 반해 양도대금 일부를 횡령하고 이 돈을 회수할 가능성이 없어졌다면 이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부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증권거래세는 이익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소유권이 이전되면 부과되는 유통세인 만큼 정 회장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고 봤다.

법조계 관계자는 "그동안 법원은 대리인의 기망행위와 관계없이 실제 일어난 거래 규모대로 과세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유지해왔다"면서 "이번 판결은 그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납세자 본인이 사기를 당해 실현하지 못한 소득에까지 과세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어서 향후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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