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진실규명해 억울한 죽음의 恨 풀어야"

인혁당사건 사형유족들, "수사 관계자 양심선언 있어야"

"명백한 정치적 살인인데 다시 조사한다고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겠습니까만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국정원의 과거사 규명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된 인혁당 사건과 관련, 사형이집행된 고(故) 도예종(사망 당시 50)씨의 부인 신동숙(75.대구 달서구 송현동)씨는이번에는 진실이 밝혀져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한(恨)이 풀리기를 기원하며 생각하기 조차 싫은 30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74년 4월 20일 새벽 5시 30분께 도씨는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집안에 들이닥친 기관원들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고 끌려간 지 1년만인 75년 4월 9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건이 있은 뒤 혼자가 된 신씨는 남편이 끌려가기 직전 휴직했던 교직에 복직하지도 못한 채 교단에서 쫓겨 났으며, '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게되자 친.인척들에게도 외면 당해 30년 동안 세월을 외롭게 보내야 했다. 이후 보따리 행상과 대한노인회 등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온 신씨는 7년여 전부터 억울하게 숨져간 남편과 또 다른 피해자들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신씨는 "남편은 당시 숨진 형님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온 지 하루만에 기관원들에게 끌려갔고 재판을 받을 때도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며 "과거 정권이 저지른 만행의 진실이 하루 빨리 제대로 밝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 사형된 여정남씨의 조카 상화(47.여.서울시 동작구)씨는 73년에서 74년 사이 고등학교 입시 전날이던 어느 겨울 "합격 엿을 준비하지 못했다"며미안해 하던 삼촌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전혀 몰랐던 상화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마지막이 될줄 몰랐지만 머지않아 삼촌과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됐다. 여정남씨는 제적과 복학을 거듭하며 경북대에 다니던 6, 70년대 대구지역에서 한일회담과 유신 반대를 주도하다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했다. 그 여파로 여정남씨의 큰 형인 상화씨의 아버지는 교편을 잡고 있던 공립학교에서 쫓겨나야 했고 항상 형사들이 상주중인 집에는 동네 사람들이 발길이 끊기는 등 가족들의 시련이 이어졌다. 현재 여정남씨의 가족으로는 5남매 중 누나와 동생 등 3명이 남아 있고 조카인 상화씨는 그동안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글쓰기 등의 활동을 벌여오다 지금은 몽양 여운형선생 추모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다. 상화씨는 "삼촌은 유신 반대운동을 하다 인혁당 관련 고 하재완 선생의 아들에게 과외 지도를 했다는 이유로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처형받았다"며 "민청학련 조직을 어떻게 해보려고 혈안이 돼 있던 공안 당국에게 삼촌은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이의 연결고리라는 좋은 빌미가 되면서 억울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이라도 국정원이 과거사를 모두 고백하고 관련정보를 공개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밖에도 건축 사업을 하다 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한 고 하재완(당시 43세)씨의부인 이용교(70.대구 동구 방촌동)씨도 "지난 정권이 조작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재조사보다는 당시 수사에 참가했던 수사관이나 기관원들이 양심 선언"을 통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희망했다. (대구=연합뉴스) 이강일.한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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