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2월 4일] <1612> 허스트 납치사건


1974년 2월4일 오후9시, 캘리포니아 버클리. 신문재벌 허스트 가문의 상속녀 패트리샤(패티) 허스트(19세)의 아파트에 남녀 무장괴한 세 명이 들이닥쳤다. 같은 방에 있던 약혼자(25세)를 제압한 괴한들은 패티를 결박하고 재갈을 물린 후 차 트렁크에 집어넣고 내뺐다. 유괴범들의 정체는 극좌 도시게릴라인 공생인민해방군(SLAㆍSymbionese Liberation Army). 체포, 수감된 동료와 교환 석방할 대상으로 유명 가문의 딸을 골랐다. 석방교섭이 거부되자 SLA는 허스트 가문에 '빈민에게 일인당 70달러에 상당하는 음식을 제공'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빈민구제에 600만달러가 투입됐어도 패티는 풀려나지 않았다. 납치 두 달 뒤에는 '악덕 자본가인 허스트 집안의 허물을 반성하기 위해 SLA에 가입하고 이름도 체 게바라의 여자친구였던 타니아로 개명했으며 남성우월주의자인 약혼자와도 헤어진다'는 패티의 육성 테이프가 전달됐다. 패티는 SLA가 은행을 터는 현장에 총을 들고 나타나 고함을 치며 고객들을 위협해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다. 전국을 누비던 패티는 납치 1년7개월 만에 납치범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에서 패티는 변호인단의 불가항력에 의한 세뇌라는 변론에도 35년 형을 선고 받고 22개월을 복역한 뒤 카터 대통령의 감형으로 납치 5년 만인 1979년 1월 풀려났다. 인질이 납치범과 동화해간다는 '스톡홀롬 신드롬'의 피해자였던 패티의 사례는 그나마 끝이 좋다. 사회에 복귀해 왕성하게 활동했으니까. 스톡홀롬 신드롬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고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고약한 시어머니가 되고 입시지옥을 경험한 부모가 아이들에게 무한경쟁을 강요한다. 가학의 반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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