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발언대] '꿈' 마저 양극화한다

노량진과 대치동 학원에서 언어영역과 논술 강의를 동시에 맡고 있는 필자는 요즘 우리 사회의 ‘부의 양극화 문제’를 실감하고 있다. 한 반에 80명이 넘는 학생들 중 예닐곱 명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겪었고 지난 70년대 과외공부와 치맛바람의 근원지인 반포에서 중학교를 다녔지만 지금처럼 빈부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당시는 교복이나 과외금지 등 빈부 격차를 교묘히 은폐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장치들이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현재 계급 고착화가 더 심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때는 최소한 우리들의 ‘꿈의 높이’가 같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곳곳에서 목격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호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필자는 노량진 학생들과 대치동 학생들이 과연 동시대에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학생들일까 싶을 정도로 다르게 느껴진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사이에는 일단 학력 격차가 현격하고 옷차림, 헤어 스타일, 학용품, 액세서리, 취미 등 이른바 ‘문화적 상징’의 차이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적 차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의 꿈 높이의 차이다. 대치동 학생들이 꿈꾸는 미래의 삶이 9급 공무원인 경우는 드물다. 반면 노량진 학생들은 자신이 과연 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까 자체를 고민하고 어떠한 것이 됐든 미래에 안정된 직장만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소속집단과 준거집단의 정확한 사회적 좌표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필자는 이들의 ‘꿈 높이의 차이’가 사회적 모순구조를 보다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브르디외의 말처럼 가장 무서운 것은 이것이 아닐까. 부의 양극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문제보다 피지배 계급이 자신의 현재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신의 삶의 높이와 꿈의 높이를 낮추는 현상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치구조나 경제구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갖가지 형태의 문화적 상징에 의해 암암리에 고착화되고 정당화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계급 고착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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