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상선 이어 일부기업 자금악화설금융시장이 이상하다. 국고채 금리가 하향곡선을 그리는 등 지표상으로는 안정세를 보인다.
하지만 기업들의 체감 자금시장은 그리 녹록치 못하다. 지표와 실물간 괴리가 차츰 커지고 있는 셈이다.
발단은 조양상선의 전격적인 법정관리 신청이다. 일부 중견기업의 자금악화설까지 뒤를 잇고 있다. 하반기 대규모 회사채 만기도래 물량을 앞두고 있어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정부는 아직까지는 태연하다. 현대건설 문제를 매듭지어서 안심하는 모습까지 엿보인다.
그러나 내심은 다르다. 채권담보부증권(CBO) 펀드와 회사채 신속인수에 이은 '제3의 자금안정책'이 검토되는 이유다.
◇조양상선, 다음은..=중견기업 자금악화설은 지난 5월 중순부터 부쩍 나돌기 시작했다.
3~4개 중견기업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았다. 조양상선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한 금융회사 자금담당자는 "자금담당자들 사이에 문제기업 리스트가 오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금융당국 상부층에서 모중견기업의 자금상황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유동성 문제설은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우량한 기업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A등급 이상 우량기업으로 판정받은 모기업의 경우 최근 사채시장에서 월 1.5%의 고금리를 지불, 자금을 융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들, 자금 가수요 현상 조짐=최근 모처럼 안정세를 찾은 금융지표를 보면 이례적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반기 회사채 만기물량에 대한 대비책 때문이다. 하반기 회사채 만기도래 금액은 32조원 규모(3분기 11조6,663억원, 4분기 21조2,139억원). 단순히 규모때문만은 아니다. 그룹들의 비관적 전망이 앞서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자금에 여유가 있는 거대 그룹도 가수요 현상에서는 마찬가지다. 삼성ㆍLGㆍSKㆍ롯데 등 4개 대그룹이 5월 한달 동안에만 회사채 발행을 통해 끌어당긴 게 1조3,000억원이다.
◇준비되지 않은 정부ㆍ금융권=금융당국이 금융권의 기업과 금융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이완되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다소 의아한 발언을 했다. "조양상선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현대건설 문제가 해결돼 이제 고비를 넘겼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조양상선과 비슷한 규모의 기업은 언제든 자금난에 부딪히고 금융권 자금회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문제가 표면적으로나마 매듭국면에 접어들면서 금융권의 기업 자금을 대하는 태도도 급속도로 흐트러지고 있다. 금융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처리에 정열을 쏟다보니 웬만한 중견기업 회생작업에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연 금융권의 보신ㆍ이기주의는 깊어지고 체력이 허약한 기업들은 금새 무너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A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과거에는 워크아웃과 같은 금융지원 시스템이 있었지만 이젠 문제기업에 대해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상황"이라며 "부실기업에 대한 시스템 접근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기업자금 사정에 대한 집중력 필요=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1ㆍ3 부실판정 작업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어느 기업이든 상시퇴출제 속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기홍 금감원 부원장은 "한계기업은 더 이상 끌고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시경제가 흔들릴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오는 9월까지 1차 상시퇴출제가 이어지는데 이 사이 만기 회사채 문제로 멀쩡한 기업이 유동성 문제에 부딪힐 경우 진로 설정이 난감해진다. 채권단이 보신주의 속에서 지원을 기피할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금융당국도 이 점을 인정한다. 현행 후순위채(CBO)나 회사채 신속인수제를 대체할 새로운 '금융 지원 장치'를 검토 중인 이유다. 그러나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여력이 고갈되는 상황을 보면 마땅한 지원 툴이 없다는 게 정부 당국의 고민이다.
김영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