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가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전과 달리 신흥국의 소비처가 아니라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다.
미 경제에서 차지하는 소비의 비중이 갈수록 줄고 있는데다 셰일혁명, 노동비용 하락 등에 힘입어 제조업 및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세계 시장을 놓고 신흥국과 '제로섬 게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중국 등 신흥국의 수출-미국의 소비'라는 전통적인 글로벌 임밸런스(imbalance) 질서가 무너지면서 한국 등 신흥국 경제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의 경상적자 규모가 1999년 이래 최소폭으로 줄어들면서 세계 소비의 마지막 보루라는 역할이 사라지고 있다"며 미국과 신흥국의 동반성장 공식도 깨지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적자 규모가 2006년 3·4분기 6%에서 올 2·4분기 2.5%로 줄어드는 등 갈수록 세계 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따르면 그동안 미 경제가 1% 성장할 경우 다른 나라의 GDP도 0.4% 늘어났지만 지금은 0.3% 증가로 감소했다.
이는 미 경제 성장세를 과거처럼 소비가 아니라 셰일가스나 제조업, 부동산 투자 등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 제조업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메이드 인 USA' 지원책과 셰일혁명에 따른 에너지 비용 감소, 노동비용 감소 등에 힘입어 신흥국 경쟁업체를 위협하고 있다.
기업 경영환경이 대폭 개선되면서 미 제조업의 본국 U턴도 잇따르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이 매출 10억달러 이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중국에 있는 제조 라인을 미국으로 옮기거나 옮길 의사가 있다는 응답률은 지난해 2월 37%에서 올 9월에는 54%까지 뛰어올랐다. 마노즈 프라한 모건스탠리 신흥시장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는 점점 제로섬 게임이 되고 있다"며 "미 경제 성장세가 다른 모든 나라에 도움이 되는 금융위기 이전의 모델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소비 증가율이 올해 1.8%에 이어 내년에는 2.2%에 그칠 것으로 전망되는 등 경제 비중이 줄고 있다. 이는 신흥국 수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주식이나 부동산 등 미국 내 자산 투자가 내년에 18%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 것과 대비된다. 또 미국이 세계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31%에서 2013년 22%로 급감한 것도 세계의 소비처라는 위상이 하락한 요인으로 꼽힌다.
문제는 이처럼 글로벌 리밸런싱(reblancing)이 가속화하면서 한국·중국·대만 등 신흥국 수출이 이상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은 물론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도 독일 수출 증가,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국의 긴축정책 등으로 경상수지가 2012년 초 이후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선 상황이다. 한국 등 신흥국으로서는 하루빨리 내수 의존도를 높이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성장률이 정체되는 국면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 3월께 출구전략에 들어갈 경우 미국보다 경제 회복세가 저조한 신흥시장의 충격은 더 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미 경제 회복세가 신흥국으로 전파되지 않는 가운데 글로벌 자금의 미 주식이나 달러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외국인 자금 이탈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국제 민간자본의 신흥시장 유입액은 지난해 1조2,000억달러에서 내년에는 1조달러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올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랜드화와 브라질 헤알화 가치는 달러화에 비해 각각 17%, 11% 급락한 반면 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지수는 29%나 올랐다.
아울러 세계 경제질서가 바뀌면서 글로벌 자금의 신흥국 투자 차별화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170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마켓필드애셋매니지먼트의 마이클 숄 회장은 "아직 신흥국 시장이 바닥에 도달했다고 보지 않는다"며 "브라질·인도 등에서 돈을 빼내 펀더멘털이 탄탄한 국가로 옮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같은 글로벌 리밸런싱이 장기적으로는 세계 경제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중국 등 신흥국은 수출만 하고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는 반면 미국은 소비만 하며 경상적자에 시달리는 과거와 같은 비정상적인 구조는 언제든지 세계 경제 붕괴를 초래할 화약고로 돌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