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싸움의 기술' 주연 백윤식<br>"사람 정서가 나이대로 갑니까?"<br>독특한 스타일 다양한 팬 확보<br>새영화서 싸움 통해 인생 전수
| 삼청동 한 까페에서 만난 백윤식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예의 영화에서처럼 익살스럽게 주먹을 쥐어 보인다. 나이? 그런 건 모른다. " 연기 세계에는 끝이 없어요. 주먹 쥐고 뚜벅뚜벅 내 길을 가면 그 뿐이죠." 이호재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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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나이 든 남자배우가 소화할 캐릭터는 사실상 정해져 있다. 완고한 아버지, 무너져 가는 노인, 혹은 요즘 유행하는 아예 망가지는 코믹 이미지. 수십년 연기판에서 다져진 그들의 노하우도 오늘 충무로에선 한낱 ‘폐품’으로 전락할 뿐이다.
그 충무로에서 배우 백윤식의 자리는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머리 빡빡 깎고 홀딱 벗은 외계인(지구를 지켜라), 질투심 많은 사기꾼(범죄의 재구성),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중앙정보부장(그때 그 사람들)까지, 백윤식이 아니라면 감히 그 누구도 소화해내지 못했을 캐릭터였다.
5일 개봉하는 ‘싸움의 기술’에서 그가 맡은 ‘판수’ 역시 판타지적인 자신만의 캐릭터 연장선에 있다. 독서실에 은둔한 싸움의 고수. “또 한번 건들면 피똥싼다”며 여지없이 상대의 관절을 꺾어대는 그의 모습에선 누구나 꿈꾸었을 만한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백윤식은 말한다. “영화 제목은 ‘싸움의 기술’이지만 판수가 보여주는 모습은 삶의 기술, 인생의 기술이에요. 극중 싸움을 전수시키는 고등학생 병태는 자신감을 잃은 인물이에요. 판수가 가르쳐주는 건 잔기술이 아닌, 자신감이죠. 영화 속에서 제가 그랬잖아요. 마음이 죽으면 몸도 죽는다고.”
어눌하면서도 또박또박 짚어내는 그의 목소리. 분명 영화, CF 속의 엉뚱하기까지 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문득 그가 올해 나이 60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기자가 묻자 “작게 말하라”고 면박을 준다.
“사람 정서가 나이대로 가는 건 아니잖아요? 흔히 나이로 정서를 구별하는데, 그게 어느 지점에 가서는 일치하더군요. 내 모습이 요즘 시류와 접목이 잘 됐다고는 생각이 들죠. N세대건 할머니건 저를 성원해 주는 폭은 같지 않나요?(웃음) 그런 점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쌓인 연륜을 존중해주는 할리우드가 부러워요.”
아무리 그래도 충무로에서 그 나이에 젊은이들에게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얻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다. 그것도 확고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백윤식의 캐릭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건 결코 아니다. TV드라마 ‘서울의 달’ 미술선생님도, ‘파랑새는 없다’의 체육관 관장도 모두 ‘백윤식’이라는 이름 선상에 있다. 모두 세상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 법한 모습이다.
“세상에 없는 모습이 아니에요. 그렇게 독특하게 사는 사람들이 정말 있다니까요?(웃음) 괴팍하고 엉뚱한 짓만 골라 하지만 돌아보면 모두 사람냄새 물씬 풍기잖아요. 그런 모습이 관객이나 시청자들 반응을 끌어냈다고 생각해요. 판타지 설정은 결코 없었어요. 저는 언제나 자연스런, 생활인다운 모습을 정공법으로 접근해 왔죠.”
‘외계인같던’ 그의 모습이 또 한번 변신했던 건 지난해 개봉했던 ‘그때 그 사람들’이었다. 역사 속 인물인 중정부장 김재규를 완벽하게 ‘백윤식’의 이름으로 소화해 냈다. 영화적으로 분명 평가받아야 할 몫이었지만 정작 영화 외적인 논란에 휩싸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찾기 힘들었다.
“아직 영화를 둘러싼 법적인 문제가 남아있어서 제가 뭐라고 나서서 말할 입장은 아니에요. 언젠가 문제가 해결됐을 때 할 말은 참 많아요. 다만 영화도 안 본 사람들이 작품으로 안 보고 갑론을박했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죠. 언론들도 그 작품 두고 영화적인 얘기는 안 했잖아요? 그 때 신문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지금이야 충무로의 별이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백윤식은 브라운관 배우였다. 요즘 사람들에겐 ‘서울의 달’과 ‘파랑새는 없다’로만 기억되지만 그의 연기 폭은 매우 넓었다.
“내가 TV문학관 최다 출연자에요. 화가 이중섭, 이상화 시인, 춘사 나운규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에도 모두 출연했어요. ‘전설의 고향’도 말할 것도 없지. 내가 ‘전설의 고향’ 1회 주인공이었어요. 100회 특집에도 출연했고. 몇 편에나 나섰냐고?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활동의 폭이 넓었기에 충무로 스타로 자리매김한 지금도 활동 무대 따윈 구분하고 싶지 않다. “작품이 좋으면 하는 거지 장르나 매체가 무슨 상관이에요. 애니메이션 성우도 꼭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다 배우로서 창작활동의 분야잖아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무슨 배우 무슨 배우 구별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 거 같아.”
연기인생 36년. “그쯤 했으니 연기철학도 확고하게 섰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런게 어딨냐”며 웃음을 던진다.
“연기는 끝이 없어요. 작품 하나 할 때마다 계속 채워가는 느낌이 좋아요. 그냥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있고 앞으로도 주관대로 또 내 길을 걸어갈 뿐이에요. 젊은 배우들에게 해 줄 말이 있냐고? 꼰대스럽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