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15> '판사와의 대화' 후기

"판사는 악당들 혼내주는 사람" 어린이들 한마디에 가슴 뭉클


지난해 8월께 우리 법원은 사회복지재단 동명원의 아이들을 초청해 법원을 보여주고 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할 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 역시 기꺼이 자원했다. 특히 ‘판사와의 대화’ 시간은 자신있으니 나에게 맡겨 달라고 동료 판사에게 장담까지 했다. 행사 당일, 나는 세 명의 판사와 함께 2조를 담당하게 됐다. 초등학교 5ㆍ6학년생 15명으로 이뤄진 조였는데 그 정도 연령대면 말귀도 알아듣고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관심도 높을 것 같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난 후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다른 판사들이 정겹게 웃으며 아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울 때, 나는 자못 근엄하게 뒷짐을 진 채 아이들 뒤를 따라만 다녔다. 막상 아이들과 만나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어떤 아이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드디어 ‘판사와의 대화’ 시간이 다가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초등학생들을 가까스로 방청석에 앉혀놓고 앞에 나가 서 있으려니 도대체 내가 왜 이 시간을 맡겠다고 나섰는지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자, 여러분. 혹시 나중에 판사님 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누구라도 들어야 이야기를 이어갈 텐데…. 화재를 돌려 다른 질문을 했다. “방금 모의재판에서 도시락을 훔쳐 먹은 잘못에 대해 일주일간 운동장 청소를 해야 한다고 판결이 났는데, 일주일이면 긴 시간인가요 짧은 시간인가요?” 아이들은 “긴 시간이요” “짧은 시간이요” 왁자지껄했다. 나는 한 아이를 지목해 “왜 길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도시락 하나 몰래 먹었다고 일주일 청소는 너무 길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다시 “그럼 훔쳐 먹은 도시락은 한 개지만 고기 반찬같이 비싸고 맛있는 반찬만 있는 도시락이었으면?” 그러자 아이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옳거니. 이제야 얘기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도시락 하나를 훔쳐 먹은 죄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하물며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런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판단하는 사람이 판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교육이 끝나고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나쁜 사람들 혼내주는 사람이요”라고 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이 판사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으니 힘도 나고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 한 편이 저려 온다. 맞아, 판사는 그런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혼내주고, 착한 사람은 도와주는 슈퍼맨 같은 사람. 여기저기서 판사라는 직업에 대해 힘 빠지는 소리만이 가득한 가운데, 나도 어느새 판사가 얼마나 멋진 직업인지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 속에서야 슈퍼맨이 악당을 혼내주고 사람들을 도와주지만, 마냥 슈퍼맨을 기다릴 수 없는 현실에서는 판사가 슈퍼맨의 역할을 대신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과 작별한 후 사무실에 올라와 기록을 보는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판사와의 대화’ 시간을 통해 아이들에게 판사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려 했는데 오히려 내가 한 수 배웠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판사를 ‘나쁜 사람 혼내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믿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계속되는 야근도 오히려 가슴 가득 행복하고 신날 텐데. 갈 길이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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