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글로벌 사태가 은행권에 던진 충격은 `충당금의 추가 적립=순익감소`라는 단순한 등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100조원대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엄청난 수업료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금융인프라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인식하게 됐다는 점이 이번 사태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그래서 은행권은 매우 착잡한 시각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SK 글로벌의 분식회계는 은행과 기업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또 이에 따른 도덕적 해이나 역선택의 문제가 은행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도 중요한 시사점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SK글로벌 사태는 금융업의 근본적인 취약점과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며 “우리나라의 금융개혁이 시스템상으로 여전히 미진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 사례”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은행의 여신심사와 위험관리 전략도 다시 한번 달라지고 있다.
◇대출심사, `그룹`중심에서 `개별기업`중심으로=SK글로벌 사태가 가져온 가장 큰 파장은 바로 `00그룹`의 이름을 달고 나가던 대출을 개별기업 중심으로 급속해 재편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크레스트의 주식매집으로 인한 SK㈜의 경영권 분쟁에서 볼 수 있듯 외국인 투자지분의 증대가 그룹의 영향력을 저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내은행들은 개별기업과 업종에 따른 대출 세분화를 발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SK글로벌 사태를 계기로 재벌기업에 대해 대출 및 여신한도를 정할 때 그룹의 신용등급(A,B,C,D 4단계) 비중을 낮추는 대신 10단계로 된 계열소속기업의 신용등급을 주요 심사기준으로 새로 선정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35개 재벌그룹의 여신한도를 25%가량(1조원) 감축했고 올해도 비슷한 수준으로 더 줄일 방침이다.
조흥은행 역시 그룹이라는 명찰보다는 계열 소속 기업의 신용도와 재무건전성을 개별적으로 따져 대출여부를 결정한다는 계획이다. 그룹과 소속 기업의 신용등급을 모두 반영한 `가중평균신용등급`을 통해 여신한도를 조정,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신용등급이 저조한 그룹의 여신한도를 축소해 나가고 있다. 신한은행도 그룹보다는 개별기업의 신용상태를 중점적으로 따져 대출을 해 주기로 하고 관련 신용평가시스템을 개발중이다.
◇종합상사 `화려한 날은 가고`=이번 SK글로벌 사태가 시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경제적인 코드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기수였던 `종합상사`시대의 종언이다. 과거 수출정책에 의해 부실을 키워왔던 종합상사들이 개별 기업중심의 무역환경하에서 생존을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SK글로벌 사태이후 은행들이 종합상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은 당연하다.
가장 먼저 종합상사에 대한 목조르기에 나선 곳은 외국은행들이다. HSBC, 스탠더드차터드, 크레디리요네 등 3개 은행이 LG종합상사 등 굴지의 국내 재벌기업들에게 신용 거래를 대폭 줄이거나 중단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과거와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국내은행 가운데 신한은행은 은행 해외현지법인의 종합상사에 대한 여신도 본사 채무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 또 종합무역상사로 집중되는 금융거래 대행에 있어서도 최대한 분산할 것을 주문하고 각 기업들에 대한 모니터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외환은행도 올들어 현대종합상사 등에 대한 여신한도를 축소하고 있고 조흥은행도 신한은행 처럼 해외외현지법인의 여신을 본사채무에 포함시켜 관리할 것을 최근 지시했다.
◇신용평가 시스템 개혁=SK글로벌 사태의 후폭풍은 은행들이 외환위기 이후 구축해온 신용평가 시스템의 전반적인 개혁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은행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각 기업별 신용도를 더욱 정확하게 판별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최근 기업대출이 급증하면서 그 필요성이 더욱더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리스크 수준을 가진 업체에 대해 위험도에 따른 차별화된 정책을 설정하는 데 현실 적인 어려움이 많다. 이에 따라 은행들의 개별 기업에 대한 신용도 파악은 사전 점검보다는 사후 영업상태를 봐가며 신용등급을 다시 매기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또 일부 은행의 경우 은행과 기업간의 근본적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감안해 명동 사채시장의 정보까지 신용파악을 위한 기초자료로 쓰고 있다. 국민은행의 경우 명동의 어음중개업체인 `중앙인터빌`과 제휴해 사채시장의 어음 할인정보까지 기업평가의 참고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과거처럼 사채시장이라고 그 정보의 가치를 무시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현실적으로 많은 상장사와 코스닥 등록사들이 사채를 끌어쓰고 있는 만큼 이들 기업에 대한 단기 금융정보 취합을 더욱더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취재 = 이진우, 최원정, 김홍길, 조의준기자 joyjun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