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자본시장의 돌파구 헤지펀드] <1부> 위기를 기회로 ① 다시 벼랑에 서다

어둠이 내린 서울 여의도에서 증권사들이 입주해 있는 빌딩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있다. 글로벌 위기 속에서 한국형헤지펀드를 준비하는 증권사들의 현재 분위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서울경제 DB


정부 규제에 정치권 무관심 맞물려 출범 연기ㆍ준비작업 중단 속출 #1. 지난해부터 헤지펀드 출범을 준비하던 A사는 최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관련 태스크포스(TF)를 팀으로 승격시키고 10여명의 인력을 배치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지만 최근 금융시장이 불안해지자 정부가 규제를 강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 과연 헤지펀드 도입작업을 예정대로 진행해야 하는지 판단이 잘 안 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초 연내 헤지펀드를 출범시키겠다던 계획도 지금은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현재 시장 상황을 비롯해 공매도 금지, 프라임브로커(PB)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이 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라며 “당분간 진행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 대형 증권사인 B사는 이달 들어 헤지펀드 준비작업을 전면 보류했다. 헤지펀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산운용사를 설립해야 하는데 검찰이 주식워런트증권(ELW) 초단타매매와 관련해 최고경영자(CEO)를 기소하면서 설립 인가를 받을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금융감독 당국에서 ELW 기소와 관련된 증권사들에 인가를 내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자체 설립안을 거의 포기한 상태다. 이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현재 상황으로는 헤지펀드 운용사 만들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게 아닌가 판단한다”면서 “지난해부터 준비해오던 사안인데 이렇게 돼서 속이 쓰리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년을 기다려왔던 토종 헤지펀드가 출범하기도 전에 삐걱거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의 글로벌 위기로 시장 상황이 나빠진데다 정부의 규제 움직임, 그리고 정치권의 부정적 반응 등이 맞물리면서 출범을 하더라도 ‘절름발이’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헤지펀드 도입을 둘러싼 시장 상황은 최악이다. 글로벌 위기로 증시가 급등락을 거듭하는데다 국내 증시에서 대규모 매도공세를 이끈 주범이 외국 헤지펀드로 알려지면서 ‘헤지편드=투기자본’이라는 인식이 커졌다. 정치권 역시 투자은행(IB)과 헤지펀드 모두를 글로벌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정부의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 움직임도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최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준의 자본 이동은 보장하되 부작용이 있는 일부 자본에 대해서는 적정한 규제가 가해질 필요가 있다”며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금융감독원이 ELW와 관련해 검찰의 기소 대상이 된 증권사에 대해 헤지펀드시장 진출을 못하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외국인을 겨냥한 공매도 금지는 절대수익률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공매도가 필요한 헤지펀드에 정책적 불안감을 안겨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헤지펀드를 준비 중이던 한 대형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최근 정부의 규제 움직임과 함께 공매도 금지가 한국형 헤지펀드 출시에 대한 정책적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헤지펀드시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무슨 사업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나빠지면서 헤지펀드를 준비하던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실제로 ELW와 관련돼 검찰로부터 CEO가 기소를 당한 몇몇 대형 증권사들은 당초 자회사 형태로 추진하려던 헤지펀드 설립계획을 접은 상태다. 자산운용사들도 헤지펀드에 대한 규제의 불확실성 때문에 계획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39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ㆍ투자자문사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에 따르면 자격요건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헤지펀드시장에 진출할 계획이 없다고 답한 업체가 4곳이나 됐다. 신규시장 진출이라는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별 이득이 없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 투자자문사 관계자는 “지금 상황은 헤지펀드를 설립해야 할지 중단해야 할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며 “현재로서는 그냥 정부와 정치권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입장”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반드시 토종 헤지펀드가 활동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작정 헤지펀드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국내 자본시장이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삼영 롱아일랜드대 교수는 “시황 변동성의 원인을 헤지펀드에서 찾는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시황이 나빠질수록 제 역할을 하는 게 헤지펀드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도입을 미룰 필요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희진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헤지펀드의 위험성을 부각할 게 아니라 국내 헤지펀드가 잘되면 외국투자가들도 끌어올 수 있고 구조조정 기업이나 녹색기술기업으로도 자금이 흘러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며 “예정대로 헤지펀드가 도입되는 게 국내 자본시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헤지펀드가 활성화되면 ‘하이리스크(고위험) 하이리턴(고수익)’ 기업으로도 흘러들어가 국내 제조업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헤지펀드의 도입이 다양한 투자기법의 도입을 가져와 자본시장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급락장 때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주가 모니터를 보며 “외국인들은 ‘크루즈미사일(롱숏 병행)’로 싸우는데 우리는 겨우 ‘박격포(롱)’로 대응하고 있으니 게임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외국인들은 다양한 투자기법을 활용해 낙폭장에서도 선방하고 있는데 국내 투자자들은 사면 내리고 팔면 올라 초주검이 돼 있는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선진 자본시장 기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헤지펀드의 도입을 미룰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 대형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한다는 철칙 때문에 헤지펀드는 투자 방법을 하루가 다르게 변화시키고 있다”며 “이러한 기법들을 받아들인다면 시장 발전은 물론 외국 헤지펀드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장안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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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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