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규모 디자인기업 A사의 한 관계자는 최근 한 대기업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단독수주한 뒤 몇주 동안의 개발 끝에 시안을 만들어 지정된 장소에 찾아갔다가 사색이 됐다. 분명 단독 수주를 전제로 회사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개발작업에 들어갔던 것인데 해당 자리에는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온 디자인회사가 몇 군데 더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주일 뒤 그 대기업은 자체 사정이 생겼다며 해당 프로젝트 자체를 무산시켜 버렸다. 결국 A사를 비롯, 입찰에 참여했던 모든 디자인회사들은 그 동안의 노력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인건비만 날린 꼴이 됐다.
#2- B사는 최근 정부의 한 산하기관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다가 그동안 개발했던 디자인 시안을 모두 빼앗겨버렸다. 공개입찰 당시 3가지 시안을 제출하고 그 가운데 하나가 선정된 것인데 해당 정부 산하기관이 "용역수행에 따른 성과품은 모두 발주처의 소유물"이라며 나머지 두개 시안까지 행사 포스터, 광고물에 사용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B사는 결국 3개의 프로젝트의 노력을 쏟은 셈이 됐다. 하지만 철저한 '을'의 입장에서 억울하지만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3- C사의 한 담당자는 최근 디자인개발 완료를 앞두고 의뢰인인 한 중견기업으로부터 추가적인 디자인개발을 요구받았다. C사 담당자는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추가 수주가 들어왔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착각이었다. 계약조건이 '무상'이었던 것이다.
C사는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해당 중견기업은 만약 무상으로 추가 개발에 들어가지 않으면 기존 계약까지 해지하겠다고 나서자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세 디자인회사들이 업계에 만연한 불공정거래에 몸서리를 치고 있다. 미래 주요 먹거리의 한 축이 돼야 할 디자인산업이 난무하는 불공정거래 속에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진흥원의 디자인전문기업 346개사에 대한 ?疽쩝떻?보고서를 보면 그동안 불공정거래 피해를 경험한 기업은 전체의 61%에 달한다. 피해유형은 ▦디자인개발 중 발생된 모든 지식재산권 탈취 ▦디자인 무단도용 ▦시장반응 저조시 개발비 지급 거부 ▦저작권 침해 배상 요구 ▦별도 라이선스 요구 ▦계약내용외 추가개발 요구 ▦계약기간 무단 연장 ▦일방적인 계약 취소및 프로젝트 무산 등 온갖 불공정거래가 망라돼 있다.
모 디자인기업의 D대표는 "불공정거래로 인한 피해를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라며 "잔금을 받지 못하고 떼이거나 디자인개발과정에서 계약내용과는 다른 무리한 요구를 받은 적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불공정거래 상대방 중 대기업(34%)과 정부ㆍ공공기관(21%)이 55%로 이들은 디자인 분야에선 철저하게 동반성장을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디자인산업이 동반성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빈사상태에 빠진 채 세계적인 경쟁력은 커녕 생존을 위협받게 만드는 장본인인 셈이다.
또 불공정거래로 인한 연간 피해건수는 1건(39%)과 2건(42%)이 가장 높게 집계됐다. 그러나 연간 평균 4건 이상(6%)씩 겪는 기업수도 상당한 비율을 보였다. 연간 피해금액의 경우 2,000만원~1억원이 43%로 가장 높게 나왔고 1억원~2억원이 29%로 그 뒤를 이었다.
이렇게 많은 디자인회사가 불공정거래에 시달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해 기업 대부분은 이를 그냥 참고 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디자인업계에 고착된 '갑을관계'때문에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것. 실제로 D 대표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매번 감수해야 하는 것은 클라이언트와의 계속적인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답답해했다.
아울러 피해구제와 관련, '대응절차가 복잡해서', '비용부담이 커서',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서'라고 응답한 비율도 각각 18%, 17%, 7%로 높게 나왔다. 이에 따라 디자인기업들은 불공정거래를 막기 위해 법률지원서비스(47%), 디자인표준계약서및 디자인대가 기준마련(34%) 등이 필요하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절실히 기대하고 있다.
디자인업계 안팎에서는 인건비 외 고정비가 거의 들지 않은 산업 특성상 부가가치가 높은 데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좋은 디자인산업 발전을 위해 불공정거래 행위를 하루 속히 근절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모 디자인회사의 E대표는 "디자인기업을 경영하면서 불합리한 '갑'의 요구에 곤혹스러웠던 적이 매우 많다"며 "디자인업계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정부에서 공인을 이끌어 내준다면 상대 기업들의 터무니 없는 횡포를 제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