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열기자의 법조이야기] 조세형 '대도'서 '좀도둑'으로
'대도(大盜)'조세형씨가 일본에서 대낮에 빈집에 들어가 '원정절도'를 벌이다 경찰에 검거되자 또다시 범행동기에 세간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조씨의 절도행각에 대해 사람들은 "도벽(盜癖)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면서 "역시 큰 도둑이던 작은 도둑이던 도둑은 도둑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았다.
조씨는 98년 11월 출소직후 "눈앞에 천만금의 보석이 있어도 거들떠 보지 않겠다"던 명세와 참회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도벽 앞에 무릎을 끓고 말았기 때문이다.
현재 조씨의 나이는 환갑을 훨씬 넘긴 63세. 그런 그가 과거 70년대 혈기 왕성할 때의 실력을 이국 땅에서 다시 한번 실험해 보고 싶어서 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앞으로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그의 범행 사실이 속속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대도=조세형'이란 별명은 '조세형=좀도둑'으로 바뀔 처지가 됐다.
조씨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재벌회장과 고위관료 등 부유층과 권력층만 대상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와 수 억대의 현금 등 전대미문의 절도행각을 벌여 이중 일부를 고아원 이나 거지 등에게 나누어 주어 한때 '의적(義賊)'으로 불리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조씨는 82년 경찰에 검거되어 83년 4월14일 절도 혐의로 기소되어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지법)에 재판을 받기 위해 구치감(拘置監)에 대기중 교도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구치감 건물벽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그 구멍을 통해 달아났다. 그는 탈주 후에도 계속 절도 행각을 해오다 6일 만에 경찰의 총에 맞고 다시 검거됐다.
서울형사지법 제14부 83년5월25일 조피고인에 대해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 했다. 당시 재판부는 김성만 부장판사가 재판장을, 조대현ㆍ김기동 판사가 배석을 맡았다. 검찰측과 조씨는 재판의 결과에 불만을 갖고 바로 항소했다.
조씨는 항소를 하면서 재판부에 "결손가정에서 자라다가 범죄에 빠져 들었으나 사회로부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기회를 받지 못한데다 흉기 소지도 없이 단순한 절도를 저질렀기 때문에 1심 양형이 너무 무겁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단호했다. 서울고법 형사1부는 같은 해 9월20일 원심을 직권으로 파기하고, 1심 형량 보다 높은 징역15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장은 김석수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는 박상선ㆍ유창석판사가 각각 맡았다.
조씨는 이 판결에 승복하고 대법원에 상고를 포기한 채 옥살이를 시작했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대도'조세형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 왔다.
그는 98년11월 출소한 뒤 '신앙인으로 거듭나겠다'는 갱생의지를 밝히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조씨는 지난 99년 4월에는 자신을 검거했던 수사반장 최중락씨의 도움으로 에스원 범죄예방자문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해 왔으며, 22세 연하의 중소기업인 이모(41)씨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고 있는 등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조씨는 앞으로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일본교도소에서 수감하게 되어 여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윤종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