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피플 인 이슈] '제2 에비타'… 포퓰리즘 극복이 당면과제

아르헨 첫 선출직 부부대통령<br>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상원의원<br>남편의 단기성장 중심 정책 극복·인플레 해결 등 시급<br>성형·브랜드 탐닉 '보톡스 여왕' '여왕 크리스티나' 별명



에비타

제2의 에비타가 페론주의가 만들어낸 포퓰리즘을 극복하고 아르헨티나 경제의 성장동력을 회복할 것인가. 28일(현지시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54) 상원의원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됨으로써 아르헨티나에서 첫 선출직 부부 대통령이 탄생했다. 아르헨티나에서선 1974년 후안 페론 대통령이 급서하고, 부통령이던 그의 셋째 부인 이사벨이 대통령을 승계해 첫 부부 대통령이 나왔지만, 선출직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페르난데스 당선자가 선거에서도 승리한 것은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경제적 치적과 에비타와 동일시해 온 선거 전략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선거기간동안 자신을 ‘제2의 에비타’로 비유했다. 아르헨티나인들의 영원한 연인인 에비타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면서 지지를 이끌었던 것.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그가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정계에 입문해 에비타와 닮은 꼴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또 얼굴엔 곳곳에 성형수술을 해 ‘보톡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어있고, 물을 마실 때도 브랜드 생수만 마시고 보석과 패션에 탐닉해 ‘여왕 크리스티나’라는 조롱도 받고 있다. 페르난데스의 당선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키르치네르가 2002년에 집권한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는 해마다 9%씩 성장하고, 실업률을 2002년 22%에서 올 2ㆍ4분기에 8.5%로 떨어뜨렸다. 그의 치적으로 국민들은 현직 대통령의 부인에게 표를 몰아 줬다. 하지만 야당은 부부가 장기집권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치분석가인 카를로스 말라무드는 “키르치네르 커플이 남편-부인-남편-부인으로 이어지는 16년의 장기 집권을 갈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페르디난데스의 당면 과제는 포퓰리즘을 극복하는 것. 외신들은 키르치네르 대통령이 8%가 넘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끌기 위해 단기적 성장에 맞춘 경제 정책을 펼친 ‘포퓰리즘’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키르치네르의 경제정책은 중장기 성장을 희생하고 단기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다음 대통령이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도 “차기 에비타를 위해 아르헨티나가 눈물을 흘리지 않기는 어렵다”고 전망했다. 에너지 문제도 중요한 과제다. 중도좌파 성향의 아르헨티나 정부는 빈곤층을 위해 싼값에 에너지를 공급했으나 이 때문에 지난 5월 심각한 전력난을 초래했다. 이 모두가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포퓰리즘에 근거한다. 페르난데스는 경제회생 방안으로 해외자본 유치를 강조한다.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해외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회생의 발판을 만드는데 실패한 데서 얻은 교훈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올해 인플레이션은 9.6%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론 25%에 이른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클라우디오 루저 국제통화기금(IMF) 국장은 “전통적으로 인플레율이 15~20%에 이르면 위기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남편의 권좌를 이어받으며 출발한 페르난데스가 서민들의 삶을 아우를 ‘제2의 에비타’가 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남편의 장기 집권을 위한 권력 유지에만 집착할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 에비타는 누구 페론 대통령 부인으로 노동자 권익향상 앞장 에비타(애칭 에바)는 1940년대 노동자의 힘을 빌어 정권을 장악한 후안 페론 장군의 부인이다. 후안 페론은 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인민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다"라며 노동자의 힘을 빌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창가를 전전하다가 배우가 된 에비타는 페론을 도와 노동자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페론은 그에 끌려 재혼했다. 페론 부부는 남미식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민간 기업을 국영으로 전환하고, 노동단체에 막강한 권력을 심어줬다. 에바는 페론이 재선에 당선된 직후 1952년 3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에바가 죽은 후 1955년 페론은 군부의 반발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해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1973년 선거에서 페론은 대리인으로 내세운 엑토르 캄포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귀국했다. 공항에서 수백만명의 지지자들이 경찰과 충돌, 수백명이 죽는 불상사가 나자, 캄포라는 하야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페론이 당선돼 18년만에 다시 대통령에 복귀했다. 그때 그는 세 번째 부인인 이사벨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페론이 1974년 7월에 급서하자, 이사벨이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이사벨은 극우파에 질질 끌려 다녔고, 76년 3월 군부에 의해 축출당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