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바꿔라" 신경영, 품질로 세계와 겨뤄 글로벌 삼성 도약 토대<br>"시장에 없는것 만들라" 경쟁자 추격의지 꺾고 명실상부 최고기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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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직원들은 '내가 제일'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위기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난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 체중이 10㎏ 이상 줄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가 사그라질 것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게 '1등'은 늘 위기이자 변화의 계기였던 것일까. 그는 1993년 이 같은 고민에 빠진다. 삼성전자가 처음으로 D램 세계 1위에 올라서는 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 전 회장은 이렇게 표현했다. "삼성 회장에 취임(1987)한 이듬해 제2의 창업을 선언하고 변화와 개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수십년간 굳어진 체질이 너무 단단했다." 삼성전자만의 진정한 글로벌 성공DNA는 이때부터 다듬어졌다.
◇글로벌 일류 품질의 시작 '신경영'=이 전 회장은 취임한 해 2월 돌연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일본 오사카, 영국 런던까지 돌며 삼성 임직원들을 모아 수백시간 열변을 토했다. 참석했던 인사들은 "그 당시 이 전 회장은 더 이상 은둔의 경영자가 아닌 신들린 것 같은 연사였다"고 회고했다.
몇 달간 세계를 누비던 이 전 회장은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대장정의 결론인 '신경영'을 선언한다. "마누라와 자식 외에는 다 바꾸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 같은 결론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전 그룹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자는 혁신의 시작이었다. 그는 "삼성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초일류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신경영 메시지는 품질을 높여 세계적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그는 역시 그해 가을 방송사 화면에 등장, 삼성전자 임직원들을 질타했다. "양(量)이 아니라 질(質)로 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양을 외치고 있다. 모든 제품의 불량은 암인데 초기에 자르지 않으면 죽는다. 삼성전자는 암이 만성기에 돌입할 수 있다."
당시 임직원들은 점유율 유지를 위한 양 위주의 전략에 익숙했다. 하지만 이후 삼성전자는 불량 수거된 휴대폰에 대한 화형식을 갖는 등 세계 어떤 기업에도 뒤지지 않는 최고 품질의 프리미엄 제품으로 도약하는 데 전략의 포커스를 맞췄다.
이런 일류화 DNA는 1990~2000년대를 관통하며 글로벌 삼성으로의 도약의 근본이 됐다. 1994년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부터 시작된 반도체 신화를 비롯,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애니콜과 1996년 '숨어 있던 1인치를 찾아라'의 명품플러스원 TV, 1997년 프리미엄 브랜드로 다시 태어난 지펠냉장고 등이 1위로 올라서면서 세계적 경쟁력의 근간이 됐다.
◇'창조경영' 통해 명실상부한 최고 기업으로=2006년 10월20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전시회 'FPD 2006'에 삼성의 거물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이 전 회장이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과 아들인 이재용 당시 상무 등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공개 전시회를 찾은 것. 그는 두시간이나 묵묵히 전시회장을 살폈다.
이 전 회장은 직후 요코하마연구소에 사장들을 불러모았다. "세계 TV 업계를 리드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십을 키워야 한다. 디스플레이 사업이 세트 업체를 리드할 정도로 실력을 확보하라. 지금보다 연구개발(R&D) 투자를 더 많이 하고 인재를 더 뽑고 키워야 한다." 당시는 삼성전자가 보르도 시리즈로 처음 TV 분야 1위 도약을 전망하고 있던 때였다.
전혀 새로운 제품으로 경쟁사의 추격의지 자체를 꺾어버려야 한다는 지시가 이어졌고 삼성전자에서는 반도체와 TV사업부의 협동 R&D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 무렵 개발 단계였던 LED TV를 한 발 앞서 상용화하는 선점 전략이 나왔다. 삼성전자는 3년 후인 올해 LED TV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제품으로 빅 히트를 거두고 있으며 일본의 소니 등 해외 경쟁사를 완전히 제친 결정타로 평가된다.
2006년에는 이 같은 '창조경영'이 화두로 제시되면서 '추격자' 삼성이 아닌 '리더' 삼성전자에 맞는 새 방향타가 됐다. 이 전 회장은 "20세기에는 물건만 잘 만들면 1등이 됐지만 21세기에는 디자인•마케팅•R&D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상품과 기술로 시장을 창출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