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산책] 서양의학의 오류

현대 서양의학의 눈부신 발전은 신의 세계로까지 근접해들어가 인간 복제, 유전자 치료 등 새로운 세계가 던지는 명제를 붙들고 고민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건강이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혹자는 현대산업문명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를 그 원인으로 든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의학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통합적 생명운동을 하는 유기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서양의학이라고 이것을 부정할 리가 없다. 그러나 기업적으로 발전한 서양의학은 생명운동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과학이 성취해놓은 눈부신 기술을 토대로 제약회사와 병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본주의의학 쪽으로 인류를 몰아넣고 있다. 인체가 정상을 벗어난 약간의 이상증상을 보이기만 하면 이 증상을 병으로 규정하고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다. 현재 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생명체는 끊임없는 조건의 변화나 재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종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자연치유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건강이라 함은 무조건 약으로 치료하기보다는 이러한 능력, 즉 자연치유력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당뇨병을 예로 들어보자. 당뇨병은 췌장에서 인슐린이 적절히 생산되지 못해 생기는 병이다. 이 때문에 병원에 찾아가면 병의 원인이 인슐린 부족에 의한 것이므로 당연히 주사 등의 방법으로 외부에서 인슐린을 투여한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췌장이 장애를 받고 있는지는 그 다음 일이다. 췌장의 입장에서 보면 장애의 원인은 제거되지 않은 채 인슐린이 외부에서 공급되므로 인슐린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된다. 췌장의 인슐린 생산 능력은 점점 저하되고 일생을 주사에 의존해 생을 유지하게 되는 셈이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체는 역학적 구조물이라는 점이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부터 인간의 질병은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책상이나 걸상을 만들 때 다리의 수는 4개다. 넘어지지 않는 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다리 수는 최소한 3개다. 두개의 다리로 만들어진 책상과 걸상이 꼿꼿이 서 있다면 우리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무거운 머리를 상단에 모시고 두 다리로 무게중심을 잡고 서 있는 인간의 모습도 사실은 신기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위험에 처하거나 적을 만나면 긴장해 자세를 낮춘다. 이 자세는 인체의 무게중심을 가능한 한 지표면에 가까이 함으로써 안정된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하기 위함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지구 중력을 받는다.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지 않으면 중력 때문에 넘어지고 만다. 좌우평형인 골격과 S자형 척추에 조그마한 변형이라도 오면 그 변형을 상쇄하기 위해 261개(인체의 총 절 수)의 관절과 수많은 근육이 크거나 작게 제자리를 벗어나 새롭게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틀리는 것이다. 이 과정 때문에 각종 질병이 생겨난다. 인간이 키우는 가축을 제외하고 자연 속에서 네발로 살아가는 동물에는 거의 질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인간처럼 역학적 비틀림에 의한 질병은 있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인간 질병의 90% 이상이 역학적 비틀림에 의한 것이라 단언해도 좋다는 것이다. 역학적 비틀림이 질병을 유발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요, 물리적 현상인데도 서양의학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물과 공기의 오염, 술이나 담배 등의 환경적 요인에 의한 질병을 제외한 장기의 질병은 그 장기를 관장하고 있는 중추신경의 장애로부터 온다. 척추가 틀어지면 추골이 이 중추신경들을 압박해 연결돼 있는 장기들에 기능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장기 질병의 일차적 원인이다. 이 원인을 그대로 놔둔 채 약물로 치료를 한들 온전한 치료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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